붉은악마 거리응원, 뜨겁게 경건했다
[현장]세월호 추모 분위기 유지, 과다노출 고성방가 없어
곳곳 '세월호 잊지 않겠다' 문구·리본으로 고조된 분위기
지구 반대편 태극전사들과 대한민국의 붉은악마들이 세월호 희생자들의 영정에 원정 8강의 가능성을 바쳤다. 비록 강적 러시아를 상대로 시원한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태극전사와 붉은 악마는 세월호 참사로 잠든 영령들에게 결코 부끄럽지 않은 결과를 합작한 것이다.
태극전사들의 승리를 바라는 붉은악마의 마음은 4년이 지나도 변함 없었지만 거리응원의 모습은 이전과는 달랐다.
18일(한국시각) 브라질 쿠이아바에서 열린 '2014 브라질 월드컵' H조 조별리그 1차전 대한민국과 러시아의 경기를 응원하기 위해 많은 시민들이 광화문과 영동대로 등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평일 오전 7시 경기인데다 최근 대표팀의 경기력이 많이 떨어졌다는 평가에 응원열기가 많이 식을 거라는 예상을 비웃듯 광화문과 영동대로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렸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대표팀을 응원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지난 4월 벌어진 세월호 참사를 여전히 마음 한 구석 담아두고 있었다.
경찰 추산 1만 3000명이 모인 광화문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 위에는 '2014 희망의 거리응원, 외쳐라 대한민국'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고, 붉은악마의 상징인 치우천왕 통천 상단에는 세월호 참사 희생자를 애도하는 노란리본이 새겨져 있었다.
붉은악마에서 북을 담당한 이학로(28) 씨는 경기 전 "세월호 사태가 아직 채 마무리 되지 않은 상황에서 예전과 같은 분위기로 거리응원을 계획하긴 힘들었지만 응원으로 침체돼 있는 국가적 분위기를 끌어올리고 싶었다"면서도 "세월호 사태를 의식해 여성들의 노출 의상 자제를 요구하는 등 눈살을 찌푸릴만한 지나친 행동은 자제하도록 유도했다"고 이번 거리응원을 설명했다.
이같은 분위기를 인지한 듯 월드컵 기간만 되면 눈에 띄던 과도한 노출 패션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사람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해 시민들의 서명을 권하는 이도 눈에 띄었다. 교보빌딩 근처에서 '세월호 서명하고 응원해요'라는 피켓을 들고 있던 조우리(28) 씨는 "월드컵 기간 동안 세월호 참사가 주목을 못 받는데 국민들이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거리에 나서게 됐다"고 전했다.
경찰 추산 2만 1000명이 모인 영동대로 거리응원 역시 세월호 참사 여파로 다소 조용하게 치러졌다.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자극적인 노출도, 고성방가도 없었다.
곳곳에는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나비 리본모양 응원도구도 눈에 띄었다. 영동대로 인도 옆에는 세월호 참사 희생자를 기리는 노란 리본도 달렸다. 축제 분위기 속에서도 세월호 참사의 아픔을 잊지 말자는 축구 팬들의 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자정부터 줄곧 자리를 지켜왔다는 박재호(44) 씨는 "여기서 즐거워한다고, 힘차게 응원한다고 세월호를 잊은 게 아니다. 온 국민이 힘을 모아 응원해서 (한국이) 이기는 것이 세월호의 아픔을 덜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경기는 후반 23분 터진 이근호(상주 상무)의 득점으로 승기를 잡아가던 한국은 6분 뒤 알렉산더 케르자코프(제니트 상테페테르부르크)에게 동점골을 허용해 1-1 무승부로 끝이 났다.
시민들은 대표팀의 선전에 기뻐하면서도 세월호 이야기를 빼놓지 않았다.
두 아이와 함께 광화문을 찾은 이정자(35) 씨는 "아이들에게 거리응원 문화를 보여주고 싶어 나왔는데 한국이 생각보다 잘한 것 같아 만족한다"며 기뻐했지만 "세월호 참사 때문에 국민들이 침체돼 있는데 월드컵으로 위로가 됐으면 좋겠다. 세월호 희생자와 실종자 가족 분들도 국민들이 다함께 슬퍼하고 잊지 않고 있으니 힘내셨으면 좋겠다"며 위로의 메시지를 전했다.
열 일을 제쳐두고 영동대로 거리응원에 나섰다는 택시기사 김모 씨 역시 "우리 국민 마음속에는 세월호가 있다"며 "세월호의 아픔을 마음에 묻고 응원하러 온 것이다. 온 국민이 하나 되는 마음이 제일 필요한 때이지 않냐"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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