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정보유출 정쟁' 불 안꺼졌는데 원인찾기만?
<칼럼>정보 인권 보장 방법부터 먼저 고민해야
호패란 것이 있었다. 나이가 16세 이상이 되면 허리춤에 차고 다녔다. 품계가 2품 이상의 사대부는 상아로 만든 호패를 찼다. 아패라고 불렀다.
과거에 합격한 벼슬아치는 각패를 찼다. 물소 뿔로 만든 호패다. 일반 서민들은 황양목패, 서족이나 상민들은 소목방패, 천민과 노비는 대목방패를 찼다. 모두다 호패다. 이렇듯 호패의 종류에 따라 신분이 달랐다. 어디서든 알아보기 쉽게 하기 위해서다.
그러하니 상아로 만든 호패나, 각패를 찬 사람들의 걸음걸이가 다를 수밖에 없다. 신분이 표시되어 있으니 말이다. 반면 대목방패나 소목방패를 찬 사람들은 반대다. 늘 주눅이 들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낮은 신분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다니니 말이다.
임진왜란 때였다. 선조가 피란을 가기도 전에 장안이 불바다가 되었다. 천민이나 상민들이 불을 낸 것이다. 왜적이 쳐들어온다는 소리를 듣고 각 관서에 방화를 한 것이다. 그곳에 보관된 자신의 신분, 신상 등을 없애기 위해서다.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그랬을까 싶다.
신분사회에 대한 억눌림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신분은 얼마나 효용가치가 있을까. 신분의 계급적 차등화는 이미 만연되어 있다. 치열한 경쟁과 신용사회 덕분이다. 그러나 신분과 신상에 대한 정보가 많이 노출되는 사회는 문제가 있다. 조선시대의 호패신분과 다를 바 없다.
세상은 상대방의 프라이버시를 많이 보장해주는 쪽으로 발달하는 게 정상이다. 그게 민주평등사회다. 국정운영에 필요한 최소한의 신상만을 갖고 있어야 한다. 이 때문에 프라이버시 침해 논란은 끊임없이 논란이 되고 있다. 현대사회가 발달할수록 이에 대한 욕구는 높아진다.
정보라는 수단으로 인해 개인의 신분과 신상이 노출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한 차등적 계급의 발생, 차별적 신분대우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 프라이버시가 인권이다. 이러한 인권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기 위해서는 법적인 장치가 필요한 것이다.
카드사의 개인정보 유출이 심각하다. 재앙에 가까울 정도다. 이미 예견된 사고다. 국정을 운영하는 사람들의 책임의식이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사적 정보의 오용과 악용은 흔하게 나타났다. 많은 전문가들은 문제점을 지적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 당국은 수수방관했다. 그토록 많은 제도적 장치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왔는데도 말이다. 결국 사고가 나고서야 허둥대고 있다.
상황을 예측하고 사전에 준비를 해왔다면 이 같은 파문은 없었을 것이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못막는 꼴이 된 것이다.’ 개인의 신상정보만이 아니라 일상까지도 노출되고 있는데도 말이다.
‘집을 나서면서부터 들어오는 시간까지’ 고스란히 기록되고 엿볼 수 있다. “내가 한달에 얼마를 벌어들이며, 내가 빚이 얼마며, 하루 종일 어디를 돌아다니고, 또 어떤 직업을 가졌는지”
나보다 남이 더 잘 아는 시대인 것이다. 정말 끔찍한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최근 언론에서 정보인권을 거론하기 시작했다. 이번 정보유출파문이 재산피해에 앞서 개인의 ‘정보인권’을 침해한 것이라고 했다.
자신에 대한 정보가 수집. 이용 및 제3자에게 제공되는 과정에 의미있게 참여할 권리라고 한다. 당연한 권리주장이다. 유출된 정보로 카드결제를 하거나, 예금이 빠져나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행동하는 모든 것을 보고 훔쳐본다’는 사실이라는 점이다. 내 의사와는 전혀 관계없이 신분되어지고, 차등되어 지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특정업체의 마케팅에 활용되고 있다. 이름도 모르는 업체의 판촉대상이 되어 있다. 어떠한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말이다. 이것이 정보인권의 실종이라고 한다.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정부나 기업은 손쉽게 개인정보를 수집하고 이용할 수 있다. 그에 비해 이러한 정보인권은 지나치게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같은 욕구는 커질 것이 자명하다.
따라서 정부는 본격적인 정보인권에 대한 제도적 보완마련에 착수해야 한다. 재산적 손실이기 전에 인권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정보가 함부로 남용되고 수집되어서는 안되는 일이다. 이 같은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이를 방치한다면, 자칫 “국가가 국민의 인권을 침해하는 일”이 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개인정보의 원칙없는 수집과 악용은 현대판 호패제도와 같다. 신분에 따라 각기 다른 호패를 차고 다녔던 조선시대라는 것이다. 차별받고, 홀대받는 시대로의 복귀인 것이다. 나도 모르게 남으로부터 상품이 되어 있고, 계급지어져 있다면 누가 그 사회를 신뢰할 수 있겠는가.
난리가 나자 관가에 쳐들어가 불을 놓았다. 이러한 조선시대 서민들이 가졌던 신분 원한이
지금에는 없다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또 한번 이 시기를 놓치면, 되돌리기 어렵다. 문제가 터졌을 때 다잡아야 한다. 개인정보 수집과 활용에 대한 철저한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사회적 담론을 형성시켜 심각성을 알리고, 정보인권에 대한 중요성을 고지시켜야 한다. 필요하다면 정보인권을 위한 국가차원에서의 조직을 구성해야 한다. 차제에 대안을 만들어 놓아야 하는 것이다.
정치권도 정쟁의 대상으로 이 문제를 바라봐서는 안된다. 국정조사를 운운하고 있다. 상임위 활용과 특위 구성을 두고 다투고 있다. 한심한 일이다. 불이 난 집에 불도 꺼지지 않았는데, 화재 원인을 두고 논쟁하는 꼴이다. 정쟁을 하기 전에 사태 수습이 먼저다.
국민에 대한 인권을 어떻게 보장해야 하는지 먼저 고민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피해를 입고 불안에 떠는 국민들의 입장에서 바라봐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정보인권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첫걸음인 것이다.
정부나 정치권이나 시민단체나 모두 같이 생각하고 행동해야 할 때다. ‘나도 모르는 누가 나를 훔쳐보고 있는 불안한 사회’는 건강할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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