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선 사태, 절망적 사건만은 아니다
'성별 진단?' 치사한 방법으로 인권 짓밟고 질서 흔들어
이번 사태 통해 글로벌 스탠다드 부합 조치 실행해야
여자축구선수 박은선(27·서울시청)을 둘러싼 성정체성 논란이 거센 후폭풍을 예고하고 있다.
박은선은 여자선수로서는 보기 드문 당당한 체구(180㎝·74㎏)를 지니고 있으면서 기량까지 탁월, 국가대표로도 활약한 한국 여자축구 최고의 스타다. 수년간 방황을 거쳐 2011년 친정팀 서울시청으로 돌아온 박은선은 이내 과거의 위력을 되찾으며 올 시즌 19골을 폭발, 리그 득점왕 등극과 함께 리그 중하위권이었던 서울시청을 정규리그와 챔피언결정전에서 모두 준우승으로 이끌었다.
이쯤 되자 다른 팀 감독들의 심사가 뒤틀렸다. 뭔가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그래서 끄집어낸 것이 성정체성 문제였다. 지난달 서울시청을 제외한 여자프로축구 6개 구단 감독들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 이들은 ‘박은선 성별 진단’ 요구를 한국여자축구연맹에 전달할 요구사항에 포함시켰다.
협의 내용은 지난 1일 한국여자축구연맹에 팩스로 전송됐다. 문서에는 '2013년 12월31일까지 출전 여부를 정확히 진단해주지 않을 시 서울시청팀을 제외한 실업 6개 구단은 2014년도 시즌 출전을 모두 거부한다'고 명시돼 있다.
이 사실이 일부 언론을 통해 보도됐고, 축구팬들을 비롯한 수많은 네티즌들이 들고 일어났다. 팀 성적에 눈이 먼 나머지 선수의 인권을 내팽개친 지도자들의 행태에 대한 분노였다.
이 과정에서 여자축구연맹은 지도자들이 이 문제를 공론화하려는 시도도 없었고, 단지 사적인 모임에서 나온 사적인 대화가 보도된 것일 뿐이라는 거짓말을 일삼았고, 박은선 성별 논란을 일으킨 당사자 중 일부는 방송 등 채널을 통해 ‘박은선을 대표팀에 뽑아야 한다’는 의견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농담’으로 주고받은 말이 와전된 것이라는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서울시청이 곧바로 기자회견을 통해 6개 구단 감독이 연맹에 보낸 팩스를 공개하면서 이들의 거짓말은 들통이 났고, 불난 여론에는 기름이 쏟아졌고 부채질까지 더해졌다. 결국, 이 문제에 국가인권위원회가 조사에 나서면서 상황은 더 이상 팀 성적에 눈이 먼 몇몇 지도자들이 벌인 해프닝 수준에서 벗어나 하나의 중대한 사회적 사건으로 확대됐다.
이번 사태 전개 과정에서 놀라웠던 것은 축구행정을 한다는 사람들과 지도자라는 사람들의 박약한 인권의식뿐만 아니라 구단 행정의 기본이 무시된 부분과 선수의 신체적 기록 내지 건강을 관리하는 한국축구 행정집단의 무지와 무능이었다.
열심히 축구에 전념해야 할 감독들이 구단의 운영을 총괄하는 단장들을 제쳐두고 도대체 어떻게 자신들끼리 비공식 모임에서 논의한 내용을 구단의 조칙체계나 행정체계를 무시하고, 직접 연맹에 전달하면서 ‘보이콧’까지 운운할 수 있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 같은 행태는 각 팀 감독들이 과거에도 이런 행태를 자행해 왔음을 시사하고 있다. 한 마디로 WK리그 운영이나 여자축구연맹의 운영에 체계도 없고 원칙도 없는 상황임을 이번 사태가 보여준 셈이다. 박은선의 성정체성을 둘러싼 논란을 해결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과거 박은선의 의무기록이나 국제대회 출전 당시 실시한 성별검사의 기록을 찾아보는 방법이지만 현재 축구협회나 대한체육회 등 그 어디에서도 그와 같은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국제 스포츠계에서는 선수들의 성별논란을 불식시키기 위해 일정한 기준을 마련하고 있지만 적어도 대한민국 축구계는 이런 사실을 몰랐거나 알고 있었으면서도 실천하지 않았던 셈이다. 적어도 기본과 원칙이라는 면에서 볼 때 한국 축구가 여전히 세계 축구의 변방이라는 현실을 이번 박은선 사태는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문제의 감독모임의 간사인 이성균 수원시설관리공단(수원FMC) 감독이 자진 사퇴했다. 고양대교 유동관 감독도 구단에 사직서를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사태의 후폭풍은 이제부터가 시작인 것으로 보인다. 팬들과 언론을 상대로 거짓말을 했던 여자축구연맹 관계자들도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박은선의 성정체성 논란과 일련의 사태는 축구 지도자들의 불순한 동기에 의해 비롯됐지만 한편으로 보면 국내 축구계는 물론 스포츠계 전반의 무지에서 비롯됐다고도 볼 수 있다.
이번 사태는 분명 한국 축구에서 부끄러운 사건이지만 한국 축구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한 번쯤은 거칠 만한 사건이었다. 박은선에 대한 성별논란을 일으킨 지도자들이 비록 치사한 방법으로 박은선의 인권을 짓밟고 WK리그의 질서를 흔든 과오가 있기는 하나 그들은 무지했고, 무엇보다 척박한 한국여자축구를 위해 헌신해 온 공신들이라는 정상은 분명 참작될 필요가 있다.
일각에서는 이번 사태에 연루된 지도자들에 대해 일벌백계를 주장하고 있지만 앞서 언급한 정상을 참작, 그들이 열정을 바친 여자축구들 영영 빼앗는 형벌이 주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따라서 박은선 사태의 수습은 추상과 같은 일벌백계가 강조되기 보다는 유사 사태의 재발방지 대책 마련에 방점이 찍히는 쪽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고 했다. 이번 박은선 사태를 놓고 한탄만 할 것이 아니라 이번 사태를 계기로 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축구계는 물론 체육계 전체가 ‘글로벌 스탠다드’에 부합하는 조치를 실행한다면, 한국 스포츠는 또 하나의 중요한 진전을 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보면 박은선 사태가 마냥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의미의 사건 만은 아닌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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