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번 출구' 미드나잇 스크리닝 초청
제78회 칸 국제영화제에 한국영화가 12년 만에 단 한 편도 초청되지 못했다. 경쟁 부문은 물론, 비경쟁과 특별상영, 주목할 만한 시선, 감독주간, 비평가주간까지 모든 섹션에서 한국영화가 자취를 감췄다는 점은 결코 단순한 부진으로 치부할 수 없는 경고음이다. 그중에서도 더욱 뼈아픈 지점은 한국영화가 그간 강세를 보여온 '장르영화' 영역마저 올해는 일본영화에 자리를 내줬다는 사실이다.
미드나잇 스크리닝 부문은 액션, 스릴러, 누아르, 호러 등 장르적 개성이 뚜렷한 작품들이 초청된다. 장르영화에 특화된 한국영화는 2008년 나홍진 감독의 '추격자'를 시작으로, 2014년 '표적', 2015년 '오피스', 2016년 '부산행', 2017년 '불한당'과 '악녀', 2019년 '악인전', 2022년 '헌트', 2023년 '탈출: 사일런스 프로젝트', 그리고 지난해 '베테랑2'까지, 칸 영화제가 취소된 2020년과 2021년을 제외하고 매년 꾸준히 이름을 올렸다. 2022년과 2023년 경쟁 부문에 진출하지 못했지만 미드나잇 스크리닝 부문 만큼은 자리를 수사해 왔다.
그러나 올해 이 자리는 일본의 카와무라 겐키 감독과 니노미야 카즈나리 주연의 영화 ‘8번 출구’가 대신했다. 150만 다운로드를 기록한 인기 게임을 원작으로, 대중성과 장르적 감각을 고루 갖춘 작품이다.
세계 영화 속 한국영화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는 우려가 직접적으로 드러난 사례다. 한국영화의 위기는 팬데믹 이후 계속 거론돼 왔다. 한국영화는 2019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칸 황금종려상과 아카데미 작품상을 동시에 수상하며 세계 영화계의 중심에 우뚝 섰다. 당시 한국영화는 예술성과 대중성, 장르성과 사회성을 고루 갖춘 독보적 사례로 평가받으며 세계 각국의 주목을 받았고, 그 여세는 일시적 반짝임이 아닌 새로운 흐름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감도 컸다. 그러나 팬데믹은 그 흐름을 정면에서 가로막았다.
코로나19의 여파로 극장 산업은 직격탄을 맞았고, 제작과 투자가 동시에 위축되면서 업계 전반이 '생존' 자체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됐다. 실험적 시도나 새로운 형식보다는 이미 검증된 서사와 스타 중심 캐스팅, 안전한 흥행 공식을 반복하는 경향이 강화됐고, 장르적 다양성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투자 배급사의 리스크 회피 기조와 OTT 플랫폼 중심의 소비 구조는 한국영화의 강점이던 장르 실험과 도전에 불리한 환경을 만들었다.
반면 일본영화는 과감한 원작 활용과 새로운 형식 실험을 병행하며, 장르와 대중성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가고 있다. 우리가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하지 못하는 사이, 일본은 사카모토 유지 작가가 '괴물'로 76회 칸 영화제 각본상, 야쿠쇼 코지가 '퍼펙트 데이즈'로 남자연기상을 수상했다. 올해도 '8번 출구' 외에도 하야카와 치에 감독의 '르누아르'가 경쟁 부문, 이시카와 케이 감독의 '창백한 언덕 풍경'이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됐다.
한국영화가 세계무대의 중심에서 밀려나고 있는 지금, 이유를 단순히 외부 환경 탓으로만 돌릴 수 없다. 세계는 여전히 영화적 실험과 새로운 감각에 주목하고 있고, 일본영화는 이를 발 빠르게 실현하고 있다. 개성이 뚜렷한 장르영화는 한때 한국영화의 돌파구였고, 국제 영화제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무기였다. 그러나 그 무기조차 더 이상 날카롭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난 이상, 내부의 구조와 방향을 점검해야 할 시점이다. 지금 필요한 건 현실을 직시하고 한국영화의 정체성에 대해 다시 질문을 던지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