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中·EU 압박 지속...설 자리 좁아지는 한국 철강
반덤핑 두고 내부 갈등도...규제 강화 VS 원가 부담
실적 악화·노사 갈등·CBAM 비용까지...총체적 위기
한국 경제의 핵심인 제조업이 복합적인 위기에 직면했다. 트럼프 충격파와 중국의 약진, 탄핵정국으로 인한 정부 주도의 정책 동력이 약화되면서 5대 제조업(반도체, 자동차, 조선, 철강, 석유화학)이 세계 선두권에서 밀려나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국내 산업의 근간인 제조업의 위기는 안 그래도 어려운 경제에 직격탄을 날릴 수 있어 비상한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다. <편집자주>
국내 철강업계가 사면초가에 몰렸다. 트럼프발 관세 전쟁으로 촉발된 글로벌 보호무역 강화와 중국의 저가 공세, 탄소 규제까지 겹치면서 수출과 내수 모두에서 압박이 거세지고 있다. 글로벌 시장 재편이 빠르게 진행되는 가운데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하면 한국 철강업계의 경쟁력은 급격히 약화될 수밖에 없다.
미국 정부는 오는 12일부터 철강·알루미늄 제품에 대한 국가별 관세 면제 및 예외 조치를 폐지하고 모든 국가에 25%의 관세를 부과하기로 했다. 트럼프 행정부 1기 당시 한국은 대미 철강 수출량을 제한하는 쿼터제를 받아들이는 대신 관세를 면제받은 바 있다. 이번 조치로 쿼터제가 사라지면서 무관세 혜택을 본 한국 철강업체들의 수익성이 악화될 전망이다.
지난해 한국의 철강 수출에서 미국은 금액 기준 1위, 물량 기준 3위를 기록했다. 미국 상무부에 따르면 한국 철강 제품은 미국 철강 수입량의 약 10%를 차지하며 중국(2%), 일본(4%)보다 월등히 높은 점유율을 보이고 있다. 이에 따라 글로벌 신용평가사 스탠다드앤푸어스(S&P)글로벌도 한국 철강업체들이 역내 경쟁사들보다 더 큰 타격을 받을 것으로 예상했다.
이미 국내 철강사들은 중국발 공급 과잉으로 인해 실적 부진이 심화되고 있다. 포스코의 지난해 영업이익은 1조4730억원으로 전년 대비 29.3% 감소했고 현대제철의 영업이익도 같은 기간 3144억원으로 60.6% 줄었다.
S&P가 최근 포스코홀딩스와 자회사 포스코, 포스코인터내셔널의 신용등급 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하향 조정한 것도 어려운 철강 영업 환경과 중국발 공급 과잉 우려를 반영한 결과다.
현대제철은 경영난으로 포항공장에서 희망퇴직을 받기로 한 데다 성과급 문제로 노사 갈등이 격화되면서 당진공장에 이어 순천공장까지 부분 파업에 돌입했다. 시장 불확실성 속 실적 악화, 노사 분규가 맞물리면서 내우외환에 직면한 셈이다.
여기에 미국의 철강 관세 부과로 대미 수출이 어려워지면서 중국산 철강이 한국을 비롯한 제3국으로 대거 유입될 가능성이 커졌다. 관세청에 따르면 최근 3년간 국내에 유입된 중국산 도금·컬러강판 수입량은 266만톤으로 국내 연간 평균 수요(261만톤)를 초과한 상태다
결국 국내 철강업체들은 중국산 저가 제품이 시장을 교란하고 있다며 반덤핑 제소를 추진 중이다. 최근 동국제강그룹을 비롯한 주요 철강업체들은 중국산 건축용 도금·컬러강판에 대한 반덤핑 제소를 결정했다. 앞서 현대제철이 중국·일본산 열연강판에 대한 반덤핑 조치를 요청한 데 이어 후판·도금강판·컬러강판까지 제소 대상이 확대되는 추세다.
다만 반덤핑 조치를 둘러싼 업계 내부의 이해관계는 엇갈린다. 원자재를 생산하는 현대제철과 포스코는 중국산 저가 제품 유입을 막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원자재를 가공해 제품을 생산하는 동국제강과 세아제강 등은 반덤핑 관세가 부과될 경우 원재료 가격 상승으로 부담이 커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특히 제강사들은 열연강판에 관세가 먼저 부과되면 중국 업체들이 도금·컬러강판 형태로 가공해 우회 수출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에 열연강판 반덤핑 조치가 시행될 경우 후속 조치로 도금·컬러강판까지 함께 규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보호무역 장벽이 높아지는 가운데 환경 규제 또한 철강업계의 부담을 키우고 있다. 유럽연합(EU은 내년부터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를 본격 시행해 탄소 배출량에 따라 수입 철강 제품에 추가 비용을 부과할 예정이다. 다만 EU 집행위원회는 CBAM 적용을 1년 연기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 변화 가능성이 있다.
CBAM이 시행되면 EU로 철강을 수출하는 국내 철강업체들은 추가 비용 부담으로 인해 가격 경쟁력이 약화될 가능성이 크다.
현재 포스코와 현대제철 등 국내 철강업체들은 탄소 배출량 감축을 위해 전기로 확대와 수소환원제철 기술 개발 등을 추진하고 있지만 이를 현실화하는 데는 막대한 비용이 필요하다. NH투자증권은 국내 철강업체들이 CBAM으로 인해 부담해야 할 추가 비용이 약 851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보호무역과 환경 규제가 동시에 강화되는 만큼 업계에서는 기존의 가격 경쟁력 중심 전략을 넘어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조선·기계·건설 등 연관 산업과의 협력을 확대해 국산 철강 사용 비율을 높이고 고부가가치 제품 개발을 통한 경쟁력 확보가 시급하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강구상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북미유럽팀장은 “미국의 대중 견제가 강화되면서 중국산 철강을 사용하는 산업에 대한 압박이 더욱 심화될 것”이라며 “조선업 등 전략 산업과의 협력을 통해 국산 철강 사용을 늘리는 등 미국의 견제를 피할 수 있는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