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1, 반지성주의
키워드 2, 자유
키워드 3, 국민통합
<키워드 1: 반지성주의>
취임사 중 단연 눈에 띄는 단어이다. “집단적 갈등에 의해 진실이 왜곡되고, 각자 보고 듣고 싶은 사실만 선택하거나 다수의 힘으로 상대 의견을 억압하는 반지성주의”라고 정의까지 내렸다. 취임사로서는 이례적인 지나친 친절이다. 왜 그랬을까. 한국 사회의 근본적 문제가 여기에 있다고 보고, 특별히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성’이 무엇인가. 쉽게 말하면 ‘사물을 옳게 판단하는 지적 능력’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그와 반대라는 대통령의 지적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동일 사안에 대해 상반된 팩트가 존재한다. 두 개의 진실이 존재한다. 조국 사태가 그렇고 세월호, 천안함, 북한 핵이 그렇다.
‘팩트(fact)’는 말 그대로 가치중립적인 사실일 뿐인데, 왜 복수로 존재하는가. 과학적 증명에도 불구하고 복수로 존재하는 것에 ‘팩트’라는 명찰을 붙일 수나 있는 것일까. 오래 알고 지내던 사람과 토론은커녕 대화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심심찮게 확인하곤 한다. 팩트가 다른 데 무슨 대화가 가능하겠는가.
‘반지성주의’의 반대말은 ‘지성주의’다. 그러나 지성주의의 반대말이 뭐냐고 묻는다면 ‘광기(狂氣)’라고 대답하겠다.
중국 문화혁명 같은 것을 말한다. 몇 해 전 어느 자리에서 “미국산 소고기 먹으면 광우병 걸린다고 온 나라가 떠들썩했는데, 소고기 못 먹어 죽은 사람은 봤어도 미국산 소고기 먹고 광우병 걸려 죽은 사람은 보지 못했다”는 나의 말에 장내가 ‘갑분싸(갑자기 분위기 싸해지다)’가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자리엔 당시 광화문 집회 참여자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런 눈치 정도는 없지 않지만 그 화제가 나오자 짓궂게 한마디를 던져보았더니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이처럼 팩트가 분명히 판가름 났어도 도무지 수정할 줄 모른다. 어떤 자리에서 조국이니 세월호니 천안함이니 하는 말을 던지면 판 깨지기 일쑤다. 이런 상태를 대통령은 반지성주의라고 질타한 것이다.
나는 ‘지성’이라는 말을 세탁소에서 배웠다. 1970년대 초반 도시에 처음 가봤더니 ‘지성인이면 외상 됨’이라는 세탁소 앞 글귀가 눈길을 끌었다. 그 뒤 어느 자리에서 “지성인들이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요?”라는 말에 소란스럽던 좌중이 점잖아지는 장면을 보았다. 그런데 오늘날 국회에는 지성인이 아닌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다. 아니, 사리 분별 정확히 하는 지성인이면 공천을 받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이 더 정확할지 모른다. 판·검사 출신이든 교수 출신이든 언론인 출신이든 변호사든 박사든 기본 팩트조차 외면하면서 진영논리에 매몰되는 모습을 많이 본다. ‘외견상 지성인’들의 반지성주의가 더 문제다.
필자는 취임사를 들으면서 다소 생경하게 귀에 걸리는 ‘반지성주의’ 단어에 무릎을 치며 공감했다. 이런 단어를 어느 스피치 라이터, 어느 언어 기술자가 써줄 수 있겠는가. 대통령 스스로 뼈에 사무치는 인식을 가지고 뚝심 있게 써넣었을 것이다.
<키워드 2: 자유>
취임사는 ‘자유’에 대한 강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하나만 꼽으라’고 하면 나는 단연 ‘자유’라고 대답하겠다. 아무리 돈 많고 권력이 많다 해도 자유롭지 않다면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감옥에서 종신형을 사는 재벌을 누가 부러워하랴. 취임사의 ‘자유’는 크게 봐서 “인류 역사는 자유의 확대과정”이라는 헤겔의 말과 동일 맥락에서 사용되었다.
윤 대통령은 정치참여 선언(2021.6.29)에서 “자유가 빠진 민주주의는 진짜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말했다. 이는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떼어 내려고 했던 문재인 정권의 헌법 개정 시도를 비판한 것이다. 취임사에서 ‘자유’를 반복 강조한 것도 이런 경계심의 발로라고 생각한다.
혹자는 자유만 35차례 말하고 대척점에 있는 평등을 말하지 않은 것을 비판한다. 그러나 대통령은 “자유는 결코 승자독식이 아니다”는 말로 그것을 대신했다. “어떤 사람의 자유가 유린되거나 자유시민이 되는 데 필요한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다면 모든 자유시민은 연대해서 도와야 한다”는 말이 그 말이다. 자유가 필연적으로 초래할 불평등을 ‘연대’를 통해 보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문간방이 행복하지 않으면 안방도 행복하지 못하다”는 보수주의자 대처의 말과 상통한다.
자유에는 상반된 두 가지가 있다. ‘누구나 다리 밑에서 잠잘 자유’와 ‘누구나 최고급 호텔에서 잠잘 자유’는 다르다. 전자는 거지를 위한 자유인 반면 후자는 부자를 위한 자유이다. 다리 밑에서 잠잘 자유가 유의미한 자유이다. 그보다는 다리 밑에서 잠잘 필요가 없도록 만드는 것이 ‘경제적 결핍으로부터의 자유’이고, 이것은 국가의 책무이다.
<키워드 3: 국민통합>
대통령 취임사에 ‘통합’이라는 단어가 들어가지 않은 사례가 있는지 모르겠다. 이를 두고 많은 비판이 나오고 있다. 나도 의외라고 생각한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지난해 8월 필자가 윤석열 경선 후보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유독 국민통합을 강조했다.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특히 잘한 것이 국민통합이다. 그래서 금모으기운동도 잘 되고 IMF 외환위기도 조기 극복이 가능했다. 나도 대통령이 되면 국민통합을 바탕으로 코로나 국난을 극복하겠다”라고 말했다. 후보 수락 연설문을 쓰기 위해 만났을 때 “가장 강조하고 싶은 키워드가 뭡니까?”라는 질문에 망설임 없이 ‘국민통합’을 들었고, 이는 수락 연설문 앞부분에 반영되었다. 그는 대통령의 최우선 책무로 국민통합을 드는 등 선거운동 유세에서도 수시로 통합을 강조했다.
그런데 정작 국민통합을 강조해야 할 취임사에서는 왜 빠졌을까. 실수일까. 취임사 준비위원만 스무 명 정도였는데 그럴 리 없을 것이다. 그럼 일부러 넣지 않았다는 말인데, 무슨 깊은 뜻이 있는 걸까. 나는 윤 대통령이 국민통합을 포기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전술한 바와 같이 그와 공식적이 아닌 자리에서 직접 나눈 대화가 너무나 생생하기 때문이다. 너무 당연한 것이기에, 다시 말하면 상투적이기에 넣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 글을 다 쓴 뒤 대통령 스스로 이에 대해 “취임사에서 통합 이야기가 빠졌다고 지적하는 분들이 있는데, 너무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라고 말했다는 뉴스를 보았다. 너무 당연한 말도 어떤 자리에서 하지 않으면 이상해질 수 있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글/유종필(전 대통령 당선인 특별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