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8일까지 샤롯데씨어터
뮤지컬에서 주연배우의 상황을 드러내거나 사건을 고조시키는 배우들이 있습니다. 코러스 혹은 움직임, 동작으로 극에 생동감을 더하면서 뮤지컬을 돋보이게 하는 앙상블 배우들을 주목합니다. 국내에선 ‘주연이 되지 못한 배우’라는 인식이 있는데, 이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심어주고자 합니다. <편집자주>
어디에 있든, 그 공간에 기분 좋은 기운을 안기는 사람이 있다. 뮤지컬 배우 배명숙은 그런 사람이다. 개인적인 성장에도 늘 열심이지만, 함께 작품을 만들어 나가는 배우들과의 호흡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가 출연하는 작품의 연습 현장은 매번 활기가 넘친다.
지난달 19일부터 샤롯데시어터에서 공연되고 있는 뮤지컬 ‘지킬앤하이드’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은 올해 배명숙 배우가 참여한 세 번째 뮤지컬이다. 코로나19로 많은 배우들이 힘든 시기를 겪고 있음에도 그가 꾸준히 작품에 출연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건, 평소 성실하게 노력하고 꾸준히 열정을 이어왔던 덕분이다. 그리고 배우들과 스태프들을 존중하고 함께 어우러지려는 그의 태도가 지금의 기회로 이어진 셈이다.
-올해로 뮤지컬 데뷔한 지 딱 10주년이네요.
무슨 일이든 10년은 버텨봐야 안다고들 하죠. 사실 전 컴퓨터 전공이었는데 어느 순간 이 일에 뛰어들어 10년 넘게 잘 해내고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럽네요. 남들 다 하는 말 그대로‘이제야 조금씩 알 것 같은, 그래서 더 잘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듭니다.
-배명숙 배우의 10년을 되돌아보자면?
데뷔 당시에는 서툰 모습들이 많았겠죠? 사회생활이나 실력 등등 모든 면에서요. 특히나 예술관련 전공이 아니었던 저는 또래 동료들을 보며 이것 저것 배우기 바빴어요. 다행히 열심히 살아온 덕인지 감사하게도 쉬지 않고 작품활동을 하고 있고, 시간이 지난 이제는 가르치는 입장이 되어 많은 후배, 제자들이 생기고 있는 것 같아요.
-배울 게 많다는 건 재미있는 일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버거운 일이기도 하죠.
나이 서른 전후쯤이었나, 성장통이었는지 지침이었는지 모를 감정이 지나쳐가던 해가 있었어요. 늘 수십 명의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 짧은 시간을 찐하게 함께 보내다가 금방 이별해버리는 것에 굉장히 지쳐있었던 것 같아요. 감사하게도 오래 쉬지 않고 작품을 해왔던 반면, 제 스스로를 돌볼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갖지 않으면서 배우생활을 해왔던 거죠.
연습을 하고 노래를 하고 사람들을 만나도 공허함과 우울함이 사라지지 않았었는데, 갑자기 모든 것을 내려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들어왔던 작품을 정중히 거절하고 6개월 정도의 쉬는 기간을 일부러 만들었고, 친동생과 함께 몽골로 떠나버렸어요.
나이가 30대로 들어서는 시기여서였는지, 실제로 몸과 정신이 지쳤던 것인지는 아직도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소박한 것에 웃는 몽골 아이들, 문명화되지 않은 거대한 자연, 인터넷이 되지 않는 환경, 온전히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오랜 이동시간, 따뜻한 사람·동물 등등에 엄청난 힐링을 받고 초심을 다시 생각할 수 있게 됐어요. 마지막 날에는 친동생과 손을 잡고 서로의 생각을 털어놓고 엄청 울었고, 발걸음 가볍게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현재는 ‘지킬앤하이드’에 출연 중이시죠.
네, 인간이란 동물은 자신이 사랑하고 사랑받을 때 ‘살아있다’라고 느낀다고 생각합니다. ‘지킬’이 사랑하는 사람, ‘하이드’가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 각 인격이 치열하게 살아있고자 하는 것이 표현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지킬’과 ‘하이드’ 모두 한 사람의 내면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에게도 적용되는 것 같아요. 모두가 인정하지만 모두를 부정하기도 하는…. ‘지킬앤하이드’는 그것에 대한 고민을 잘 나타낸 작품인 것 같아요.
-극중 어떤 역할들을 연기하고 있나요?
정신병동의 환자, 약혼식파티의 메이드로 출연하기도 하지만 주로 하류층을 연기하고 있어요. 상류층(부자, 귀족 등)이 모든 결정을 하고, 모든 부를 갖는 것에 대한 분노를 갖고 있는 계층입니다. 또한 마지막에 ‘엠마’의 들러리로 나오는데요, ‘엠마’와 함께 오래도록 기다렸던 결혼식인 만큼 축복의 눈길을 보내다가, ‘지킬’이 ‘엠마’를 위협할 때 걱정하고 많이 놀라는 인물입니다.
-캐릭터를 어떻게 연기하고자 했나요?
하류층으로 나올 때는 연기와 노래를 거칠고 되바라지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양 극단에 있는 다양한 감정을 표현하려고 최대한 노력해요. 그래야 단체씬이 풍성해지고 메시지가 확실해지니까요. 예를 들면 넘버 ‘살인, 살인’(Murder, Murder)에서 처음에는 주교의 죽음에 시니컬하게 비꼬는 느낌으로 등장을 하는데, 사건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작은 자극에도 소스라치게 놀라며 침착함을 잃고 제발 살려달라는 감정으로 확장을 합니다.
-가장 애정하는 넘버가 있다면요?
‘나도 몰랐던 나’(Dangerous game)입니다. 워낙 좋아하는 노래이기도 하고, 이 작품에서 가장 솔직한 노래가 아닌가 싶어요. 연출님께서 이 장면을 설명하실 때, ‘하이드’에게 영향을 받는 모습을 표현해달라고 하셨어요. ‘하이드’와 ‘루시’가 서로를 탐할 때, 주변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하이드의 어두운 기운에 물들어서 나도 모르게 부끄러운 행동을 하게 된다는 서브텍스트가 있는 장면이죠. 다음에 공연을 보러 오실 때 앙상블들의 움직임과 표정에도 주목하시면 더 좋은 장면이 될 것 같습니다.
-무대에서의 일화도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이 역시나 ‘나도 몰랐던 나’인데요. 저와 함께 밀접한 움직임을 하는 친구 중 한 명이 제 남편의 오래된 제자이자 동생이기도 해서 한동안 이 친구가 난감해하며 격한 매너손을 하고 있던 기억이 납니다. 하하.
-앙상블로 참여하시면서 가장 힘들었던 부분이 있다면요?
힘들다기보다는, 앙상블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안타까운 부분이 있어요. 앙상블이라는 역할도 없어서는 안 될 귀한 포지션이고, 각자 영역에서 최선을 다해 노력한 사람들이 모인 포지션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래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주인공에게 시선이 집중되다 보니 앙상블 개개인의 능력이 저평가되거나 간혹 말씀을 쉽게 하시는 분들이 계시거든요. 앞으로는 그 시선이 조금씩 바뀌어 나가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가장 보람을 느끼는 지점은요?
누군가에게 인정받을 때 큰 보람을 느끼는 것 같아요. ‘내가 헛살지 않았구나, 열심히 성장하며 살아왔구나, 어제보다 나은 내가 되었구나’라고 느껴지니까요. 예를 들면 언니(혹은 누나) 말씀 많이 들었다며 먼저 알아봐주고 다가와주는 사람들이 있을 때! 두 번째론 오디션 때 감독님들이 많이 늘었다, 이렇게 잘하는지 몰랐다 등등의 칭찬을 가끔 해주실 때가 있는데 그 때 정말 감격스럽습니다.
-‘모래시계’(18)에 참여했을 당시 예그린 뮤지컬 어워드에서 앙상블상을 수상하셨다고요. 이 상이 어떤 의미일지 궁금해요.
데뷔 이후 주로 라이선스 뮤지컬 위주로 작품 활동을 해왔는데, ‘모래시계’는 굉장히 오랜만에 하게 된 한국 순수 창작 작품이었어요. 창작 과정에서 있었던 배우·스태프들의 과감한 시도와 열정들이 이 상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공연예술’ 자체가 수많은 사람들이 한 무대를 만들어 내는 것이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앙상블상이라는 것은 우리 모두가 하나가 되었다는 뜻으로도 느껴지기에 굉장히 기분이 좋았습니다.
-‘히드클리프’ ‘비틀쥬스’에 ‘지킬앤하이드’까지 올해만 벌써 세 작품을 하고 있는데요. 매우 바쁘게 보낸 한 해였을 거 같아요.
2020년 4월에 개인적으로 수술을 받은 이유로 작품 활동을 쉬어야 했는데요, 이 정도면 잘 복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참 감사한 올해였네요!
-사실 코로나로 공연계도 어려운 시절을 보내면서, 많은 작품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일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끊임없이 공연에서 배명숙 배우를 찾는 이유가 있을까요?
성실, 노력, 열정, 우애라고 생각합니다. 연습을 하다 보면 사람들이 저에게 ‘열정 터진다’라는 말을 자주 하는 것 같아요. 그 노력을 알아봐 주시는 것 같습니다. 또한 팀 사람들끼리 사이가 좋아야 좋은 공연이 나온다고 생각을 해서 늘 관계적인 측면에서도 노력을 기울이는 편이고, 실제로도 제가 참여했던 작품들이 모두 화기애애했는데 그런 면을 믿어 주시는 게 아닐까요?
-뮤지컬 외에도 연극, 오페라, 콘서트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고 계십니다. 이런 활동이 배명숙 배우에겐 어떤 의미일까요?
저를 발견하고 점검하는 의미이기도 하고, 여러 방면의 평균치가 꽤나 높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 같아요. 새로운 것에 적응을 잘한다는 의미도 되려나요?(웃음) 그리고 어렸을 때 밴드보컬, 댄스동아리 등등 취미로 했던 다양한 경험들이 자양분이 되어 더 다양한 분야의 무대를 펼칠 수 있는 것 같아서, 어렸을 때의 열정을 되새김하는 의미도 있는 것 같아요.
-‘함께’하는 것을 매우 강조하시는 것 같아요.
맞아요. 그게 제 배우로서의 신념이기도 해요. 배우라는 직업은 절대 혼자 잘 할 수 없다, 그래서 ‘함께’하는 것이 중요하다. ‘함께’ 잘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연구하자는 마음입니다. 또 행운은 ‘준비된 자’만이 잡을 수 있다는 건데요, 노래도 춤도 대사도 모두 감정과 연기라는 것이 저의 신념입니다.
-그간 뮤지컬 배우로 살아오면서, 큰 영향을 미쳤던 사람이 있나요?
현재 같이 살고 있는 남편이요! 안무가 겸 배우인 이종혁을 꼽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이런 저런 고민을 나눌 때마다 답을 해주는데, 존경할 부분이 굉장히 많거든요. 처음엔 제가 그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많았어요. 그런데 결국에는 남편 말이 맞을 때가 대다수더라고요(웃음).
특히 저보다 창작 작품을 몇 배나 더 한 선배님으로서, 스태프의 입장으로서 저에게 늘 ‘시도해라’라고 말합니다. 이번 ‘지킬앤하이드’에서도 정해진 상황 안에서 매일 다르게, 최대한 다양한 것들을 시도하려고 하는데 이것도 예전의 저였다면 상상도 못할 일이죠. 안정감을 찾고 계산하는 저를 마구 두드려 자극해주는 가장 좋은 선생님입니다.
-앞으로는 어떤 활동들을 보여주실까요?
앞으로는 노래·연기 쪽으로 많이 보여드릴 기회를 찾을 예정입니다. 작품은 많이 했는데 저라는 사람에 대한 자료가 인터넷에 많지는 않더라고요. 그동안 너무 쑥스러워서 겁을 많이 냈던 것 같은데요, 작품 활동을 기본으로 하면서 뮤지컬 강의를 하거나 커버영상을 찍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저라는 배우를 많이 알리고 싶습니다. 또한 빠른 시일 내에 대학원에 진학하여 더 공부하고 싶은 욕심도 있는데요, 앞으로의 활동을 기대해주세요.
-배우로서 혹은 한 사람으로서의 목표도 궁금합니다.
오랫동안 이 일에 머무르며 늘 발전하고 싶고요, 선한 영향력으로 오래오래 남아 늘 관객들이 기다리는 배우가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함께 일하는 스태프·배우분들도 저에게 좋은 에너지를 받으며 함께 작품에 임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