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전기차 전환 속도 높이면서
내연기관차 부품업체 위기 심각
업종 전환 기술·자본 모두 부족
탄소중립을 목표로 내연기관 중심 자동차 산업이 전기차로 전환하면서 기존 자동차 부품업체들의 위기가 가속하는 분위기다. 짧게는 십여 년 길게는 20~30년 가까이 내연기관 부품 제조로 기업을 꾸려온 업체들은 친환경 자동차 전환을 어떻게 따라갈지 막막하다고 호소한다. 자동차 부품 외 다른 생산품을 가진 기업들은 그나마 주력 상품을 전환할 가능성이라도 있지만 내연기관 부품 전문 업체들은 물러설 곳이 없는 상황이다.
경남 양산에서 자동차 엔진 점화플러그 관련 부품 기업을 22년째 운영하는 한 모(63) 씨는 최근 전기차 관련 공부를 시작했다. 내연기관 자동차 시대가 사실상 끝나고 있다는 걸 인정하고 업종 전환 준비에 나선 것이다.
한 씨는 인터넷 정보를 바탕으로 책도 사고 동영상도 열심히 보고 있지만 업종 전환에는 아무런 실마리를 못 찾고 있다. 최근에는 대학 자동차학과 교수까지 만나 도움을 구했다.
한 씨는 “전기차 시대가 오면서 우리 같은 엔진 부품 공장들은 정말 심각한 위기로 몰리고 있는데 도저히 길을 찾을 수 없다”며 “그냥 있을 수는 없으니까 전기차나 수소차 관련해서 공부를 시작했는데 아직은 아무것도 이야기할 게 없다. 전문가 도움을 받고 싶어 수소문 중”이라고 말했다.
전기차 전환, 인력 최대 38% 감소…지역 경제 흔들릴 수도
자동차산업협회에 따르면 현재 정부가 추진 중인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법(탄소중립법)’ 기준인 2018년 순배출량 대비 35% 이상 탄소배출 감축을 달성하려면 전기차 약 385만대가 보급돼야 한다. 전기차 보급 확대는 내연기관차 시장 축소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울산상공회의소가 지난 5월과 6월 두 차례에 걸쳐 지역 자동차 부품업체 200개사를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친환경차 전환을 준비하고 있다’는 응답은 25%에 불과했다. 응답 기업의 75%는 ‘여력이 없다’고 답했다.
전기차 전환은 기업의 생존 여부와 함께 심각한 일자리 문제로 이어진다. 관련 업계에 따르면 기존 내연기관차에서 전기차로 생산을 전환할 경우 필요 인력이 최대 38%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회사가 문을 닫지 않더라도 인력 감축은 필연적이라는 의미다. 특히 내연기관 업체들이 밀집한 지역은 고용 충격이 지역 경제 전체를 뒤흔들 수도 있다는 경고까지 나온다.
자동차 냉각기(라디에이터)를 주력으로 생산하는 경남 창원의 A 업체는 2023년까지 전체 120명 직원 가운데 20%를 감축하기로 했다. 이후 필요에 따라 추가 구조조정을 이어갈 수도 있다. 노조에서 강하게 반발했지만 대표 강모(57) 씨는 불가피한 선택이라며 노조를 설득했다.
강 대표는 “앞으로 전기차에는 쓰이지 않는 냉각기를 대신해 다른 부품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구조조정을 안 할 수 없다”며 “지금으로선 최대한 인력 감축 규모를 줄이고 시기를 늦추는 방법이 최선인데 정부가 탄소 감축을 서두르니 (구조조정도) 마냥 늦출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의 탄소중립 정책 속도에 강한 불만을 제기했다. 강 대표는 “정부가 이렇게 빨리 전기차 전환을 추진할 줄 몰랐다”며 “아직 내수나 수출은 (내연기관이) 괜찮은 상황인데 이렇게 (전기차 전환을) 서둘러 버리면 우리 경우 눈앞에 있는 이익을 포기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업계 “대응 능력 부족 하청업체 현실 직시해야”
정부 정책 속도가 빠르다는 지적에는 이미 전기차 중심으로 업태를 바꾸고 있는 기업들도 공감하는 부분이다. 자동차 배기가스 저감장치(EGR)를 생산하는 B 업체는 지난해 부산에 전기차 전용 부품 생산을 위한 공장을 신축했다. 대표이사가 예전부터 전기차 시대를 대비해 온 덕분에 수천억원 규모 신규 투자를 결정하고 주력 생산품 전환 작업에 나설 수 있었다.
B 업체 대표는 “우리 경우 수년 전부터 연구개발(R&D)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나름 전기차 전환도 서둘렀는데도 지금 정부 정책 속도를 따라가기엔 벅차다”며 “수십 년 동안 해온 일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으로 접근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물리적 시간이라는 게 필요한데 (정부가) 그런 시간마저 안 주려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지적했다.
일각에서는 정부가 완성업체의 전기차 전환속도만 생각하고 2·3차 하청업체 실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꼬집기도 한다.
한 업계 관계자는 “대기업인 완성차 업계에서는 이미 기술 변경이나 산업 전환과 같은 연구를 할 수 있는 조직과 기술을 다 갖추고 있지만 하청업체들은 그런 게 전혀 없는데 정부가 속도만 계속 높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정부는 이러한 지적에 권역별 ‘미래차 전환 종합 지원 플랫폼’ 등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완성차·대형 부품기업이 참여하는 수요기업 협의회를 운영해 미래차 개발·구매 계획 공유와 더불어 컨설팅·금융·판로 등을 일괄 지원할 계획이다.
부품기업 미래차 전환 기획과 사업 재편 역량 강화를 지원하고 미래 준비와 신사업 진출을 위한 이종산업간 협력의 장도 구축하기로 했다. 세부적으로 정보통신(IT)기업이나 스타트업 기업과 협업을 통해 협력모델을 발굴하고, 기술개발이 완료된 품목의 시제품 성능 평가를 지원한다는 계획이다.
정부 대책에 업계는 회의적인 반응이다. 한 업체 관계자는 “내용을 잘 들여다보면 딱히 우리가 뭘 해야 하는지를 설명해주는 부분이 없다”며 “구체적 루트(방법)도 모르겠고 수요기업 협의회만 하더라도 우리 같은 작은 업체들엔 참여 기회조차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다른 산업과의 협력이나 IT 기업과 협업 같은 것도 정부가 어떻게 연결할지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우리 피부에 와닿는 방법은 아니다”며 “내연기관 부품 중에 다른 산업에서 쓸 수 있는 것들을 연구하거나 우리가 가진 장비나 재료들을 활용해서 생산가능한 대체 상품을 고민해주는 게 지금은 더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