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서 건국 공로자 지워버린 듯
웬일로 보수정권들 공적까지 열거
깨어날 줄 모르는 남북화합 백일몽
도무지 짐작이 안 되는 게 한국 현대사에 대한 집권세력의 인식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광복 76주년 경축사에서도 변함없이 대한민국 건국의 역사와 그 의의를 건너뛰었다. 독립운동가들의 공적을 기리면서도 건국 공로자들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독립운동과 상해임시정부에 바로 자신의 집권기를 이어붙이는 식의 화법을 구사했다. 대한민국은 상해임시정부로서 이미 건국됐고, 자신은 그 적통이라는 인식이 그의 모든 관련 연설문에 깊이 배어 있다(2018년 이후 그걸 소리 내 말하지 않는 것은 1919년 건국설이 1948년에 건국됐다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통성을 훼손할 소지가 있기 때문인 듯하다).
기억에서 건국 공로자 지워버린 듯
그는 집권 기간이 길어질수록 김대중·노무현 정부 모시기에 소홀해지는 인상을 준다. 김 전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진정한 국민의 정부’를, 노 전 대통령은 ‘시민혁명의 정부’임을 선언했다. 이에 대해 문 대통령은 ‘촛불혁명의 정부’임을 국내외 어디에 가서든 거듭거듭 주장해 마지않았다. 후계정권임을 부인하진 않지만 정권 등장의 혁명성, 그 의미의 탁월성에서는 독보적인 존재이고 싶어 하는 빛이다.
“촛불혁명으로 국민 모두가 함께 꾼 꿈은 ‘나라다운 나라’, ‘함께 잘 사는 나라’였습니다.”
그는 경축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 혁명이라는 것이 무엇을 바꾸고 이뤄냈는지 이해 못하는 국민이 많다. 이런 게 ‘나라다운 나라’ ‘함께 잘 사는 나라’일 수는 없다는 인식에 대한 공감대가 확대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도 이들은 자기 정당화와 미화를 굽히지 않는다. 발가벗은 임금을 군중 앞에 세워두고 “봐라, 얼마나 아름다운 옷이냐!”라며 소리를 질러대는 모양새다.
“자주국방은 지난 100년 간 우리의 절실한 꿈이었습니다.”
그가 이런 말을 한 배경을 짐작하긴 어렵잖다. ‘건국 100주년’이라는 인식의 연장선상이다. 이처럼 1948년 건국된 대한민국을 한사코 부정하고 싶어 하면서 연설 말미에 ‘대한민국 대통령 문재인’이라고 쓰는 까닭을 모르겠다(1919년에 건국된 대한민국을 말한다고 할지 모르겠는데, 그렇다고 할 경우 그 건국의 초대 대통령 또한 이승만이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다만 이번 연설에서는 개발연대(開發年代)도 불러낸 게 눈길을 끈다.
“1960년대 경제개발 5개년 계획부터 경제·사회개발 계획, 신경제 계획과 IT산업 육성, 녹색성장과 창조경제로….”
박정희(경제개발계획이 2공화국 정부 때 입안된 것을 감안하면 장면까지 포함된다)·전두환(제5차 경제사회발전 계획: 박정희의 연장선상으로 봤을 수도 있다)·김영삼(신경제)·김대중(IT산업)·이명박(녹색성장)·박근혜(창조경제)시대에 골고루 인심을 썼다. 문 대통령이 보수 정권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일은 과거와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로라도 선심을 쓴 까닭이 없을 수 없다.
웬일로 보수정권들 공적까지 열거
① 작년 우리나라 1인당 GDP가 G7의 이탈리아를 넘어섰다. 지난 6월 유엔무역개발회의는 우리나라를 선진국으로 격상했다. 이게 ‘나라다운 나라’ ‘함께 잘 사는 나라’를 위한 문 정권의 노력만으로 가능했다고 하면 헛소리가 된다. 그래서 마지못해 배경설명조로 열거했을 듯하다. ② 곧 제20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된다. 만약 정당 간에 정권이 교체되면 문 대통령에게 심한 고초가 닥칠개연성이 있다. ‘촛불혁명’의 명분아래 전임·전전임 보수정권에 가했던 정치적·사법적·심리적 숙청을 떠올릴 법하다. 떠났거나 흔들리는 민심을 끌어안아 지지표로 연결시키기 위한 화해의 레토릭일 수가 있다. ③ 늦게나마 편벽된 좌파 이데올로그라는 이미지를 씻어내기 위한 이념성 세탁의 일환인 것 같기도 하다. ④ 선진국으로 공식 인정받고, G7의 꼴찌 국가를 1인당 GDP로 눌렀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여유일지도 모르겠다(이는 코로나 효과이고, 그걸 문 대통령과 정부가 누리게 됐다). ⑤현실적으로 보수정권들의 공적을 빼면 남을 게 없다.
문 대통령에 대한 국내 여론조사 지지율이 별로 흔들리지 않는 것도 역설적으로 코로나 효과다. 순전히 정치적 득실로만 말하자면 코로나 창궐의 혜택을 남달리 누리는 집권자가 된 셈이다. ① 하루 신규 확진자 수가 한달 하고도 한주일이 넘도록 계속 4자리수를 기록하고, 닷새째 2000명을 넘나드는 상황이지만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양호하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K방역이라는 것이 국민의 사회 및 경제생활에 대한 강압적인 통제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부는 말하지 않는다). ② 문 대통령의 끊임없는 K방역 자랑이 여론의 악화를 막는 효과를 가져왔다. ③ 백신확보에 있어서 정부는 무능·무책을 여지없이 드러냈지만 위기에는 정부에 대한 심리적 의존도가 높아지는 경향이 있다.
과다·왜곡 계상된 점수가 그대로 유지될 수는 없다. 내년 대선 때, 그리고 임기 후에 문 대통령과 그의 정부에 대한 평가는 아주 냉정하게 이뤄질 것이다. 무엇보다 그의 대한민국 정통성 부정, 지나친 좌편향적 정치·경제관, 이로 인한 국민의 분열·갈등·대립과 시장의 대혼란에 대해 국민과 시대의 책임추궁이 호될 수밖에 없다. 국민은 가재·붕어·개구리가 아니므로!
깨어날 줄 모르는 남북화합 백일몽
대북정책에 있어서도 그는 여전히 꿈을 꾸고 있다(아무래도 백일몽 같은 꿈을).
“동독과 서독은 신의와 선의를 주고받으며 신뢰를 쌓았고, 보편주의, 다원주의, 공존공영을 추구하는 ‘독일모델’을 만들었습니다. (중략) 비록 통일에는 더 많은 시간이 걸릴지라도 남북이 공존하며, 한반도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를 통해 동북아시아 전체의 번영에 기여하는 ‘한반도 모델’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이 무리한 사고를 정당화하기 위해 4년여를 국민적 분열·정신적 부담을 가중 시켰다. 동서독이 신의와 선의를 주고받으며 신뢰를 쌓았다는 전제부터가 허구다. 동독 주민들의 서독에 대한 동경을 고조시키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민족 재결합을 촉진시키는 요인이 되긴 했다. 그러나 동서독 당국 간에 신뢰가 구축됐었다는 것은 억지다.
구소련이 여전히 강성했다면, 고르비가 양해하지 않았다면, 동독 정권이 급속히 약화되지 않았다면, 동독 주민들의 자유에 대한 열망이 폭발하지 않았다면 브란덴부르크문은 지금도 건재할 것이다.
우리가 통일의 꿈을 현실적으로 꿀 수 있는 제1조건이자 절대적 조건은 북한 체제의 근본적 변화다. 문 대통령이 말하는 온갖 희망적 레토릭도 그 이후에나 의미를 갖게 된다. 그걸 북한 문제의 전문가로 자처하는 문 대통령이 모를 리 없다. 그러면서도 계속 허구를 사실인양 주장한다. 맹물에 자신의 통일 의지를 불어넣어 특효약을 만들었다고 선전하는 격이다.
또 하나, 북한 주민의 자유에 대한 동경과 욕구가 화산처럼 분출하지 않으면 통일은 불가능하다. 독일 통일이 말해주는 게 그것이다. 그런데 문 정권은 반대로만 간다. “김정은의 폭정이 더 강화되게 돕자. 그래야 신뢰가 쌓이고 통일이 된다.” 따지고 보면 이런 주장이다. 이 황당한 논리와 주장을 철회하지 않으면 우리는 김정은·김여정의 손에 놀아나는 마리오네트(marionette) 신세를 면할 수 없다. 퇴임 전에 ‘문재인 식 대북정책은 실패’였다는 양심선언이 있기를 기대한다. 과욕일까?
글/이진곤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