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화업계, 원재료 상승 부담 가중…공급과잉에 판가 하락 압력 우려도
정유업계, 재고평가이익 있지만 제품 수요 회복이 실적 개선 '열쇠'
뛰는 유가를 바라보는 정유·석화업계는 착잡하다. 가파른 유가 상승이 뚜렷한 수요 증가 보다는 주요 산유국 간 갈등과 경기 회복에 대한 기대심리가 더 반영된 것이라는 진단이 더 우세하기 때문이다.
제품 수요 회복이 더딘 상황에서 자칫 원재료 구매 부담만 높아지게 되면 마진(제품-원재료 가격차이)이 떨어져 수익성만 더 악화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코로나19 여파로 불확실성이 높아진 정유·석화업계가 예의주시하며 촉각을 곤두세우는 이유다.
석유화학 업종은 원료 및 연료를 모두 원유에 의존해 유가 상승에 따른 직접적인 영향을 크게 받는다.
석화 산업의 주 원료인 나프타는 원유에서 정제돼 나온다. 평균 제조원가에서 차지하는 나프타 비중은 70%를 상회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제 유가가 상승하는 만큼 나프타 판매 가격이 오르게 되고 이는 고스란히 석화업계의 비용 부담으로 이어지는 구조다.
잇따른 설비 경쟁에 따른 공급과잉으로 원가 상승분만큼 최종 제품 가격에 반영하기 어려운 점도 문제다.
실제 중국 등 해외 기업들이 에틸렌, 프로필렌 등 신증설에 나선데다 LG화학, 롯데케미칼, GS칼텍스 등 국내 정유·석화업체들도 지난 수 년간 단행해온 나프타 분해설비(NCC)를 증설을 대부분 완료하면서 석유화학제품 공급과잉 및 마진 하락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NCC는 나프타를 고온에서 분해하는 설비로, 에틸렌과 같이 합성섬유나 합성수지를 만드는 기초원료로 생산한다. 이들은 범용제품인 만큼 기술 장벽이 낮아 한국·중국을 비롯한 각국에서 공격적으로 설비 증설에 나서는 상황이다.
석화업계, 원재료 상승 만큼 타격…공급과잉으로 마진 하락 우려 높아져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는 '코로나19가 석유화학산업에 미친 영향' 보고서를 통해 "NCC 비중이 높은 아시아 지역에서 에틸렌 생산량이 지속 증가할 것으로 전망되며, 이에 따른 공급과잉 및 마진압박 우려된다"고 진단했다.
실제 올해 들어 에틸렌 생산능력이 크게 늘어나면서 에틸렌-나프타 스프레드가 눈에 띄게 하락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t당 529달러를나타내던 스프레드는 올해 1월 484달러로 떨어진 뒤 7월 9일 현재 296달러까지 하락했다.
더욱이 전기전자, 자동차 등 수요 산업 경기가 국제유가 상승으로 영향을 받게되면 석유화학제품 내수 시장도 함께 위축될 가능성이 높다.
한 석화업계 관계자는 "유가 상승 자체 보다는 원재료 상승분을 최종 제품 가격에 모두 전가하기 어려운 점이 문제"라면서 "수요가 따라주지 않으면 제품 가격 인상에 제동이 걸리게 되고, 그만큼 기업 부담이 커지게 된다"고 설명했다.
정유업계 역시 국제유가 상승에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있다. 국제유가 상승과 석유제품 수요 증가가 동반돼야만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현재 정제마진 흐름을 보면 수요 회복으로 인한 유가 상승세라고 진단하기 어렵다. 정제마진은 휘발유와 경유 등 석유제품 가격에서 원유 가격과 수송·운영 등 비용을 뺀 가격을 말한다.
쉽게 말해 원유를 수입한 후 정제해 휘발유, 경유 등의 석유 제품을 만들어 팔 때, 얼마만큼 이익을 남길 수 있느냐는 것으로, 통상 업계에서는 배럴당 4~5달러를 정제마진 손익분기점(BEP)으로 판단한다. 따라서 원료비만 오르고 석유제품 수요가 그대로면 정유사들에겐 손해가 발생하게 된다.
싱가포르 복합정제마진은 지난해 초 코로나 확산 이후 4월부터 7월까지 마이너스를 지속하다 같은 해 8월에야 플러스로 돌아섰다. 그러나 수요가 개선되지 못해 아직까지도 3달러를 밑돌고 있는 상황이다. 역마진이 지속되는 상황으로, 석유제품 수요가 여전히 낮음을 보여준다.
만일 석유제품 수요 증가 없이 원유값만 올라간다면 정유사들은 연말까지 '유가 효과'만 기대해야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더욱이 수요 회복이 더딘 상황에서 자칫 원유 구매 부담만 높아지게 되면 마진(제품-원유 가격차이)이 떨어져 결과적으로 정유사들의 수익성이 하락할 수 밖에 없다.
유가 상승으로 정유사 재고평가이익↑…관건은 석유제품 수요 회복
국제유가 상승은 한편으론, 정유사들에게 재고평가이익(원유 구입 시점과 제품 판매 시점 차이를 통해 갖는 이익)을 준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다.
정유사는 원유를 매입한 후 정제 과정을 거쳐 통상 2~3개월 후에 판매하기 때문에 유가가 단기간에 급등하면 상대적으로 싸게 산 원유 비축분의 가치가 올라 이익을 본다. 1분기에 이어 2분기에도 원유 평균 가격이 오른 만큼 정유사들은 어느 정도 이익을 봤을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재고평가이익은 일회성 이슈이기 때문에, 수익 개선에 한계가 있다. 정유사들은 '정제마진'이 BEP 수준으로 올라야 안정적인 회복 기조에 들어선 것으로 본다.
아직까지는 수요 회복세로 이어지고 있다고 판단하기 어렵지만 그나마 주요 에너지 기관들이 회복 전망을 내놨다는데 희망을 걸고 있다.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지난달 보고서(MOMR)를 통해 올해 글로벌 석유 수요가 하루 평균 9658만배럴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했다. 작년 9063만배럴 보다 6.6% 늘어난 수치다.
OPEC은 올해 들어 석유 수요 전망치를 상향 조정하고 있다. 미국·중국 등 주요국의 경기부양책과 코로나19 봉쇄조치 완화 등을 반영한 것으로, 2019년 대비 96% 수준을 달성할 것으로 내다봤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제품 수요가 함께 회복돼야만 정유사들의 수익 개선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유가 추이를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면서 "유가 인상분을 석유제품 가격에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거나, 오히려 제품 수요가 떨어지게 되면 정유업계의 채산성은 악화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