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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효승의 역사 너머 역사㊲] 청일전쟁은 이렇게 시작됐다


입력 2021.07.13 14:01 수정 2021.07.13 13:05        데스크 (desk@dailian.co.kr)

1890년 나가사키항ⓒ위키

1870년대 세계 무기 시장의 중심은 아시아였다. 1860년대 미국 남북전쟁과 1870년대 초 보불전쟁이 끝난 직후 남아도는 무기의 상당수가 아시아로 흘러들었다. 당시 청은 전 세계 무기의 절반 가량을 사들였다. 중국은 무기를 사들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중국 내에 공장을 짓고 무기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때 우리가 서양식 신식 총으로 알고 있는 총기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레밍턴류가 대세였지만, 나중에는 독일식 마우저 소총을 라이센스해 마구 찍어내기 시작한다. 얼마나 많이 생산했는지, 이 총은 6․25전쟁 당시까지도 중국군의 주요 총기로 활용된다. 우리가 흔히 교과서에서 배우는 양무운동의 결과였다.


당시 청은 독일에서 배를 수주했다. 진원(鎭遠)과 정원(定遠)이라는 7000톤 급의 철갑함 두 척을 독일의 불칸 조선소에 발주해서 공급받았다. 이 두 척은 당시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큰 배였다. 이로써 1880년대 초반 청에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함대가 만들어진다. 이홍장 휘하에 있는 북양함대가 그 주인공이었다. 이 함대는 당시 동북아시아에 주둔한 영국 함대나 미국 함대보다도 우위에 있었다. 범위를 단순히 동북아시아로 지역을 한정했을 때의 이야기지만, 청의 성장세는 놀라웠다.


중국 북양함대 진원(위) 정원ⓒIllustrated London News Group

이때 서양에서, 특히 미국에서는 ‘황색공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당시 미 서부는 남북전쟁 이후에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도시가 성장했고, 우리가 잘 아는 캘리포니아 금맥도 발견되어 사람들이 서부로 향하는 중이었다. 이른바 ‘골드 러쉬’이다. 그런데 그 맞은편에 있는 중국의 성장에 대해, 엄청난 함대가 위협하고 있다는 식으로 일부에서 공포마케팅에 활용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미국 서부를 중심으로 중국인 배척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이러한 중국인 배척 운동의 또 다른 유형은 자신들을 ‘극서(極西)’라고 주장하던 일본에서도 일어났다. 일본에서는 대청 강경책이 정부 주요 정책으로 자리잡고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앞에서 이야기한 군함 사들이기도 이러한 상황의 연장선이었다. 그러다 보니 일본과 청 간의 대립이 빈번하게 일어났고, 그 대표적 사건이 1880년대 초 일어난다. 북양함대가 일본에서 무력시위를 한 것이다. 바로 나가사키 사건이다.


사건의 경위는 단순했다. 청의 원래 목적은 러시아를 견제하는 것이었다. 청은 진원과 정원이 포함된 북양함대를 동원하고, 우리나라 원산 앞바다를 경유하여 중국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돌아가는 길에 북양함대는 잠시 일본 나가사키 항에 정박했다. 이때 중국 수병 500여 명이 마음대로 상륙해 말 그대로 난동을 피웠다. 이들은 일본 경찰과 충돌했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청 측의 잘못으로 일어난 사건이었고 사상자 수도 비슷했다. 그런데 북양함대의 수장인 이홍장은 되려 당시 일본 총리인 이토 히로부미를 협박했다. 전적으로 일본 측의 잘못이니 이에 대한 사과를 해야 한다, 그리고 일본 경찰이 칼을 휴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청 측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니 이에 대한 후속 조치를 해라 등등의 요구를 했다. 어찌 보면 내정간섭이었지만, 만일 후속 조치가 이어지지 않을 경우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협박에 일본이 굴복했다.


결과적으로 일본이 몇 배 더 많은 배상금을 물게 된다. 또 청의 강력한 항의로 일본 경찰은 일종의 자존심 같았던 도검 휴대를 금지 당한다. 몰락한 사무라이나 자경단 같은 형태로 자경단 역할을 하던 이들까지 모두 칼을 휴대할 수 없도록 하였다. 일본에서는 이를 이른바 ‘나가사키의 굴욕’이라고 표현한다. 이 사건은 우리에겐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본 내부적으로는 엄청난 굴욕으로 받아들여진다. 이후에 NHK드라마로 제작된 ‘언덕 위의 구름’(坂の上の雲)에서도 이 상황이 매우 굴욕적인 형태로 묘사되었다.


나가사키의 굴욕은 한편으로 미국에게 엄청난 충격을 준다. 북양함대의 위력이 생각보다 강하다는 것은, 즉 자신들이 확보하고 있던 하와이와 캘리포니아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즉 일부에서 청의 위협이 공포마케팅이 아니라 진짜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것은 좀 더 강력한 형태의 중국인 배척 운동으로 이어진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서, 일본은 나가사키 사건을 통해서 해군력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어떻게 하면 청의 위협을 극복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실제로 청은 일본을 공격할 의사가 거의 없었는데도, 일본은 그것을 엄청나게 부풀린다. 청은 언제든 자신들을 침략할 수 있고, 청의 군대가 언제든 올 수 있다는 식으로 신문에서 떠들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이른바 ‘대청위협론’이 주요한 정책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다.

그 사이에 낀 조선은 고민에 빠졌다. 청과 일본 중 어디와 협력해야 할지 고민하다 많은 이들이 청을 선택했다. 조선 정부는 청에 영선사도 보냈고, 병기국을 만드는 과정에서 학생들도 보냈다. 하지만 일본 뒤에는 엄청나게 많은 나라가 있었다. 청의 발전과 군사력 증강을 우려하는 나라들이 일본의 편을 들어주기 시작한다. 우선 영국이 일본에 배를 공급했다. 당시 영국은 2개국 표준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해군력 2위 국가와 3위 국가를 합친 것보다 강한 해군력을 보유해야 한다는 2개국 표준이라는 법률이었는데, 이를 벗어나는 범위까지 일본을 지원했다.


군사 지원보다 중요한 것은 금융 지원이었다. 미국과 영국의 돈이 대거 일본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원래 유럽 국가들은 중국에서 손해를 보고 있었다. 유일하게 아편으로 이를 극복할 수 있었는데, 그것도 점차 중국이 정신 차리면서 여의치 않게 되었다. 무역 수지는 점점 나빠지기 시작했고, 열강은 이를 극복할 방안을 찾기 위해 골머리를 앓았다. 이런 여러 문제들이 결합되면서 열강들의 이해관계는 전쟁을 추동하는 요인들이 되기 시작했다. 결국 이는 청일전쟁까지 이어졌다.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soothhistory@nahf.or.kr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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