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사람들은 아편전쟁(1840~1842년) 이후 청이 서구 열강에 굴복하여 영토가 분할된 것처럼 알고 있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맞는 부분은, 분명 청 제국이 서구 열강의 우위를 어떠한 형태로든 경험했다는 점이다. 그것이 비록 해전으로 한정되었다 할지라도 청 제국은 세계 제국으로서 무소불위의 위상을 더 이상 지속하기 어렵다는 점을 분명히 자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해국도지’ 같은 바다로 접근하는 서구 열강을 어찌 막을 것인지 대책을 설명하는 책까지 발간되었고, 그 책은 이후에 조선에도 전파되어 번역되었다.
반면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편전쟁 직후부터 서구 열강이 청의 영토를 분할했다는 믿음이다. 열강이 중국 영토를 피자 조각 자르듯 나누는 위의 삽화는 아편전쟁이 끝난 지 약 60여 년 후인 1898년에 그려진 것이다. 즉 아편전쟁의 영향으로 청의 영토가 분할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청의 영토 분할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은 그 직전의 청일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상 청과 일본 간의 전쟁이 끝난 뒤에 서구 열강은 본격적으로 청의 영토 분할에 들어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우리는 아편전쟁 이후 청의 영토가 마구잡이로 서구 열강에 의해 분할된 것처럼 알고 있다.
아편전쟁 직후에도 영국을 비롯해 서구 열강은 청 제국을 견제하면서도 중국을 붙잡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중국을 붙잡아야 하는 이유는 당시 서구 언론에서 중국을 묘사한 표현에서 잘 알 수 있다. ‘4억의 중국인’이라는 표현은 당시 중국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표현 중에 하나였다. 4억이라는 단어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사실상 중국인만 사로잡을 수 있다면 엄청난 시장을 확보할 수 있고, 그곳에서 큰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당시 유럽 전체보다도 큰 시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더욱이 19세기 중반부터 유럽은 대략 10년 단위로 경제 공황을 경험한다. 경제 공황의 원인은 다양했지만, 원인보다 중요한 것은 경제 공황을 극복하는 방법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방법은 새로운 시장을 찾는 것이었다. 새로운 시장으로 가장 적합한 곳은 이른바 ‘무주지’(無主地)라고 불리는, 주인 없는 땅이었다. 이런 무주지를 식민지로 삼아 자원을 약탈하거나 물건을 판매할 수 있었다. 서구 열강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경제 공황에도 불구하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문제는 1880년대가 되면 더는 그런 곳을 찾기 어려워졌다는 점이다. 1900년대 초반이 되면 전 세계에 남아 있는 무주지는 없다고 영국에서 공식적으로 선언할 정도로 더 이상 새로운 시장을 찾을 수 없었다. 서구 열강은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그전까지 백인이 들어가지 못하던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오세아니아의 내륙까지 탐험이라는 미명하에 점령하기 시작하였고, 그것은 유럽 열강 간의 분쟁으로 이어졌다. 그 절정이 1884년 콩고 분쟁이다.
유럽 열강은 아프리카 내륙까지 경쟁적으로 진출하였고, 이러한 진출 경쟁은 각 지역에서의 마찰로 이어졌다. 이러한 마찰은 콩고강 어귀에 대한 포르투갈의 지배권 주장으로 극심한 대립으로 발전했다. 결국 비스마르크 중재 하에 베를린에서 ‘아프리카 분할’에 대한 회담을 개최하였다. 즉, 유럽 열강이 일찍부터 진출한 아프리카마저도 내륙 지방의 지배권 정리가 본격화된 시점은 1884년이었다. 그렇다면 이전까지는 남아있던 아프리카의 무주지가 사실상 정리되었다는 의미가 된다.
중국에서 서구 열강의 내륙 진출이 본격화된 것은 1860년 2차 아편전쟁이 끝난 이후였다. 하지만 여전히 한계가 있었다. 육로로 중국 내륙을 진출하기란 극히 어려웠다. 우선 각종 풍토병을 비롯하여, 운송 수단의 한계가 존재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주로 하천을 이용했다. 대표적인 것이 양자강을 통한 주요 도시에 진출하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몇가지 이점도 있었다. 이미 중국은 수나라 이후에 내륙 수로가 어느 정도 정비된 이후였기에 하천과 수로를 이용한 진출은 매우 용이하였다.
이때 주요 수단은 전통적인 중국 배인 ‘정크’선이 아닌 포함이었다. 포함은 유럽에서 가져온 배가 아니라 중국에 있는 조선소에서 건조하였다. 중국에서 중국 하천에 적합한 포함을 중국인의 힘으로 건조했고, 이를 이용해 서구 열강이 내륙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남아 있었다. 4억의 시장에 무엇을 팔것인지 하는 점이었다. 여전히 중국에서 만드는 제품이 유럽에서 만드는 제품보다 우월한 것이 다수 존재하는 상황에서 유럽 상품이 우위를 점하기란 어려웠다. 이때 등장한 것이 마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 열강이 중국에서 상품의 질적 우위를 점하기까지는 30여년이 더 걸렸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서구 우위의 세계 질서도 알고 보면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soothhistory@nahf.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