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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선의 올드무비⑳] 자고 나면 기억상실, ‘내가 잠들기 전에’


입력 2020.11.30 02:00 수정 2020.11.29 21:49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영화 '내가 잠들기 전에' 스틸컷 ⓒ 이하 영화사 진진 제공

꼭 완벽한 영화만 볼 필요는 없다. 좀 아쉽고, 조금 엉성해도 미덕이 꽤 큰 영화들이 있다. 일테면 영화 ‘내가 잠들기 전에’(2014)가 그렇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디 아워스’, 2003), 남우주연상(‘킹스 스피치’, 2011)에 빛나는 니콜 키드먼과 콜린 퍼스의 연기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볼 이유가 충분하다.


아쉬운 점을 미리 털고 가볍게 시작해 볼까. 작가 S.J 왓슨은 스릴러 소설 ‘내가 잠들기 전에’로 혜성처럼 등장했다. 데뷔작이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할 것 없이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의 작가 J. K. 롤링과 비견되는 성적이었다. 그런 소설을 영화화하는 것이었고, 영화 ‘블레이드 러너’ ‘델마와 루이스’ ‘글래디에이터’의 리들리 스콧이 제작자로 나섰다. 영화 ‘한니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촬영감독 벤 데이비스, 영화 ‘트렌인스포팅’의 프로덕션 디자이너 케이브 퀸, TV드라마 ‘왕좌의 게임’의 의상 디자이너 마이클 클랩튼이 가세했다는 것도 기대를 키웠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 보니, 역시 과한 기대는 금물. ‘졸작’이라기보다는 예상한 것과 결이 다른 영화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 스틸컷 ⓒ코리아픽처스·㈜노바미디어 제공

‘내가 잠들기 전에’는 기억상실에 관한 영화다. 기억상실은 예술의 단골 소재다. 영화만 해도 ‘메멘토’(2000), ‘이터널 선샤인’(2004) 등 수작들을 이미 우리가 많이 봤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메멘토’는 단 10분밖에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가 악조건 속에서 아내의 살인범을 좇는 이야기다. 10분 후면 잊어버릴 소중한 단서들, 사진에 메모로 모자라 온몸에 문신을 새기는 남자의 외로운 싸움이 처절하다. 파고들수록 범인의 정체가 예상과 다르게 흐르는 게 또 하나의 긴장감을 형성한다.


미셸 공드리 감독의 ‘이터널 선샤인’은 일부러 기억을 지우는 사람들에 관한 얘기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 너무 아파서 그 추억을 지우고 싶은 사람들. 과연 사랑했던 기억을 지우는 게 상처 치유에 도움이 되는지, 후회는 없는지, 사랑이라는 운명은 결국 원형을 반복하며 기억쯤 지워도 제자리로 가는 것인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기억을 지워 주는 자들은 과연 사랑의 부질없음에서 자유로운지, 현명한 사랑을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러한 명작들이 있음에도 로완 조페 감독의 ‘내가 잠들기 전에’가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어떤 이유 때문일까. ‘내가 잠들기 전에’는 자고 나면, 아침이 되면 과거의 기억을 잃고 자신이 20대인 줄 알고 깨어나는 중년의 크리스틴(니콜 키드만 분)에 관한 이야기다. 크리스틴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이고 왜 여기서 이 남자와 살고 있는가’이다. ‘메멘토’의 10분에 비하면 훨씬 더 긴 시간을 기억하는 데다 아내를 죽인 살인범을 찾겠다는 목표에 견주자면 처절함이 덜할 수 있다. 누구나 해봄 직한 사랑을 잃고 생명을 잃은 것처럼 아파하는 ‘이터널 션샤인’의 주인공들에 비교해서도 공감 폭이 좁을 수 있다.


기억상실로 시작하는 하루 ⓒ

역설적이지만, 그래서 좋다. 치매에 의해서든 사고 후유증으로든 스트레스에 의해서든 그렇게 멀리에 있지만은 않은 기억상실의 ‘일상’을 ‘내가 잠들기 전에’가 보여준다. 내게 닥친 일이라고 생각해 보자. 아침에 눈을 떴는데 침대 옆에 한 남자가 다정히 잠들어 있다. 이름은커녕 누군지도 모르겠는데 함께 있다. 잠에서 깬 남자는 부드러운 얼굴과 말투로 자신의 이름이 벤(콜린 퍼스 분)이며, 남편이라고 설명한다. 기억이 없다는 망막함은 얼마나 깊은 심연에 빠진 느낌일까.


생각해 보면 남자도 미칠 노릇이다.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여자에게 매일 자신을 설명해야 하는 남자, 아픈 사람을 두고 떠나지도 못하고 곁을 지켜야 하는 고통도 남자에게 ‘천형’처럼 느껴질 것이다. 기억을 잃고 아침을 맞는 여자의 혼란, 그 혼란을 곁에서 지키는 남자의 인내를 니콜 키드먼과 콜린 퍼스는 섬세한 숨결과 미세한 표현들로 연기했다.


누구를 믿을 것인가 ⓒ

크리스틴은 차갑지만 지극한 벤에게 고마워하기는커녕 뭔지 모를 심리적 거부감을 느낀다. 벤이 출근한 후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내쉬 박사라는 남자는 자신이 10년 전부터 매일 전화를 걸어 당신의 상태를 알려준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곧이어 만난 두 사람은 내쉬 박사의 주도 아래 기억상실증을 고치기 위한 치료와 노력을 함께 해나가는데, 남편에게는 비밀로 하라고 한다. 크리스틴은 혼란스럽다. 자상한 남편을 믿어야 할지, 정도 이상의 친절로 자신에게 시간을 내주는 박사를 믿어야 할지. 일단은 박사의 조언대로 남편 몰래 숨겨둔 카메라에 오늘 알게 된 ‘나에 관한 정보’들을 영상일기 쓰듯 저장해 둔다.


영화는 우리에게 집중을 청한다. 내가 크리스틴이 되어 벤이 보여주는 행동과 반응에 이상한 점은 없는지 살피고, 내쉬 박사를 저울질한다. 하루하루 새로이 알게 되는 정보들을 기억하고, 새롭게 떠오르는 기억의 파편들을 잊지 않고 담아둔다. 진실은 무엇일까.


사진은 진실을 담보한다? ⓒ

크리스틴의 질문은 진화한다. ‘내가 누구인가’에서 ‘나는 어떻게, 무엇을 하다가 기억상실이 되었는가’에 집중한다. 매일 새로 태어나는 아기처럼 하루를 살다 보니, 이 작은 발전이 참으로 더디게 이뤄지지만 결국은 진실을 향해 나아간다. 자꾸만 생각나는 얼굴의 상처, 떠오르는 이름 마이크, 좁고 긴 복도 그리고 폭행. 상처는 누구의 것일까, 마이크는 누구일까, 상처는 마이크의 것일까. 나에게 폭력을 가한 사람은 누구일까, 상처 난 자일까, 마이크일까. 나에겐 과연 가족이 남편만 있었던 것일까, 어쩌다가 친구건 누구건 모든 관계가 거세된 것일까.


기억을 잃은 크리스틴에게는 세상의 모든 게 자신만 모르는 비밀처럼 느껴질 것이다. 흔히 어제를 살지 말고 오늘을 살라고 얘기하는데, 크리스틴과 같은 처지가 되어 보면 어제의 어제들이 내가 딛고 설 ‘땅’이다. 설 땅이 없는 크리스틴은 오늘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부유한다. 하지만 벤은 크리스틴을 위한 것이라며 과거의 일들을 얘기해 주지 않는다. 그저 함께 있는 오늘에 만족하기를 바란다. 사실 벤에게는 크리스틴에게 숨겨야 할 비밀들이 있다. 그 비밀이 크리스틴과의 오늘을 지켜주고, 비밀이 탄로 나면 더 이상의 오늘은 없다고 생각한다. 정말로, 비밀이 지켜줄 수 있는 우리의 무엇이 있을까.


남자의 비밀과 진실 ⓒ

영화의 설정 자체가 크린스틴이 ‘주’이고 벤이 ‘부’이다. 콜린 퍼스는 이 점을 명확히 알았다. 똑같은 스토리를 영화 ‘나를 찾아줘’ 같은 추격극으로 풀 수도, ‘메멘토’ 같은 액션 수사극으로 풀 수도 있지만 조용한 스릴러, 심리극으로 풀어나가는 이상 크리스틴과 벤이 팽팽한 대결 구도일 수 없음을 알았다. 콜린 퍼스는 연기할 때도 니콜 키드먼에 반응하며 맞췄다.


개봉 당시 공개된 제작노트를 보면,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방향을 잘 잡아놨는데도 막상 액션이 들어가면 ‘크리스틴은 내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하구나. 과소평가하고 있었네’라는 생각이 들어 설정보다 더 달래는 말투를 쓰는 등 사전에 고려하지 않았던 연기를 선보였다”고 밝혔다. 또 “크리스틴에게 다가가 껴안아 안심시켜 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장면이 있는데, 그에게 벤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다가섰을 때 불안한 표정을 보이면 ‘크리스틴은 이럴 준비가 안 됐구나’ 생각하게 되면서 장면은 갑자기 다른 양상을 띠었다”고 회상했다.


명배우들의 약속되지 않은 연기 ⓒ

그래서 김이 빠진다는 얘기가 아니다. 로완 조페 감독은 부부지만 부부가 아닌 두 사람의 동거, 창과 방패와도 같은 두 사람의 생생한 관계 표현을 위해 리허설 방식보다는 즉흥 연기를 추구했다. 콜린 퍼스와 니콜 키드먼, 니콜 키드먼과 콜린 퍼스이기에 가능한 선택이었다.


상상해 보면, 약속된 연기 없이 니콜 키드먼은 아이처럼 칭얼대고 콜린 퍼스는 이에 맞춰 본래 캐릭터인 냉정함을 누르고 부드럽게 달랜다. 이야기가 이쯤 흘렀으니 포옹으로 안심을 전할까 하며 콜린 퍼스가 다가서지만 니콜 키드먼이 경직된 얼굴로 물러선다. 그런 연극 무대에서의 실연과도 같은 연기가 영화 프레임 안에 고스란히 담긴 것이다. 한 번쯤은 대배우들의 계산되지 않은 연기, 예상과 달리 흘러간 연기, 감상해 볼 만하지 않은가.

홍종선 기자 (dunastar@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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