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은? 결혼은?" 기죽는 한마디…명절이 두려운 '미생'들
명절 스트레스 1위 '잔소리, 덕담도 정신적 부담될 수 있다'
"사회적 변화 인지하고 이해하는 노력과 공감적 대화 필요"
명절 스트레스 1위 '잔소리, 덕담도 정신적 부담될 수 있다'
"사회적 변화 인지하고 이해하는 노력과 공감적 대화 필요"
# 대학 졸업 후 청년인턴만 3차례. 인턴만 3번 경험해 친구들 사이 '인삼녀'(인턴만 3번한 여자)로 통하는 박세영(28) 씨는 작년 이맘때쯤 모처럼 고향에 내려가 명절을 보냈지만 남은 건 상처뿐이다. 명절에 모인 친척들의 관심이 박 씨의 취업 여부에만 쏠려 있었기 때문. 졸업과 동시에 그럴싸한 기관에서 여러 번 인턴생활을 하며 가족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박 씨는 만년 인턴 신세를 면치 못하며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올해부터는 그나마 있던 인턴자리도 모두 끊기면서 사실상 백수 신세가 된 취업준비생 박 씨는 취업소식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부모님과 지난 하반기 취업에 성공한 동갑내기 친척이 모두 모이는 이번 설 연휴가 두렵기만 하다.
# 번듯한 직장이 있는 김성현(39) 씨도 명절이 두려운 건 마찬가지다. 올해로 20년째 자취생활을 하고 있는 김 씨는 몇 년 전부터 조카들 사이 '독신주의자', 친지 어른들 사이 '노총각'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똑똑하다'는 칭찬을 듣고 자라며 명문대 합격에 대기업 입사까지 집안의 자랑이었던 김 씨는 최근 몇 년 새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집안의 걱정거리가 됐다. 1년에 한두 번 만나는 가족들은 기회만 되면 안부보다 만나는 사람을 먼저 묻는다. "집도 있고 직장도 멀쩡한 네가 왜…" 가족들의 잔소리는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다. 작년 명절에는 일 핑계로 고향을 찾지 않았지만, 올해는 어떤 이유로 잔소리 폭격을 피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오랜만에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정을 나누는 명절이 취업준비생이나 미혼자에게는 피하고 싶은 자리가 되고 있다. 이들에 대한 가족들의 과도한 관심과 기대가 '명절 증후군'이라는 단어로 통용된 지 오래다. 음식 장만과 손님 접대, 집안일로 고생하는 주부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명절증후군이 '미생'(未生)들에게 또 다른 정신적 스트레스로 작용하고 있다.
실제 가족들의 잔소리는 설 명절 최대 스트레스로 꼽힌다. 온라인 취업포털 '인크루트' 조사에 따르면 구직자 10명 중 2명은 '올 연휴 단 한 순간도 마음 편하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취업준비생 사이에서는 '공부·취업준비를 해야 하는 것에 대한 부담(26.4%)이 최대 걱정거리로 꼽혔고, '가족, 친인척 모임에서 빚는 잔소리나 비난 등 갈등(24.2%)'도 스트레스의 주범 중 하나로 나타났다.
이 같은 스트레스는 귀향길 부담으로 고스란히 나타난다. 실제 직장인 5명 중 2명은 이번 추석 명절 연휴기간에 고향에 갈 계획이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 취업포털 '사람인'이 최근 직장인 834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전체의 39.4%가 '올해 추석에 귀향할 계획이 없다'고 응답했다. 귀향 계획이 없다는 응답 비율은 미혼 직장인(44.6%)이 기혼 직장인(28.4%)보다 훨씬 높게 조사됐다.
또한 '명절 스트레스' 조사에서도 '잔소리, 불편한 친척과의 만남 등 정신적 부담'이 1위를 차지했다. 응답자의 절반 이상은 '직장 및 직업', '결혼 여부', '취업 여부' 등으로 친척들과 비교 당하는 스트레스를 받았고, 이로 인해 귀향에 부담을 느끼는 것으로 조사되기도 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명절 대피소', '잔소리 대처법' 등도 생겨났다. 명절연휴가 되면 카페, 도서관, 학원이 명절대피소로 불리며 호황기를 맞고 있고, 온라인상에서 명절 대비 행동수칙 등이 유행하기도 한다.
실제 각종 취업 학원에서는 명절 스트레스로 갈 곳이 마땅치 않은 청년들을 위해 설 연휴 기간 동안 '명절 대피소'를 운영하고 있다. 서울시내 유명 학원들은 연휴 기간 동안 강의실과 스터디룸 등 학습공간을 전격 개방하고, 각종 편의시설 및 간식과 음료를 제공한다.
이 시기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설명절 잔소리 대처법' 등 명절 대비 행동수칙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온라인 커뮤니티 등 소모임에서 각 개인이 명절 기간 생존법에 대한 콘텐츠를 만들어 공유하거나 다양한 토론을 펼치기도 한다.
이 같은 현상에 전문가들은 취업난과 비혼, 저출산 등 사회적 문제가 지속되며 명절 풍경도 점차 변화할 수 있다고 진단한다. 또 1인 가구 증가 추세 속 고향을 방문하지 않고 혼자서 연휴를 즐기는 문화가 자리 잡으면서 과거 온 가족이 모여 유대관계를 쌓는 명절의 의미가 점차 약화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특히 사회가 변화하는 만큼 명절 문화도 그에 맞게끔 바뀌어 가면서 급변하는 사회 속 벌어진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간 인식의 간극 만큼 소통의 어려움도 커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에 서로 변화를 인지하고 이해하는 노력과 공감적 대화가 필요한 때라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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