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카카오톡
블로그
페이스북
X
주소복사

청와대 비아그라 보도 경쟁 언론도 촛불 대상


입력 2016.11.27 12:39 수정 2016.11.27 12:44        데스크 (desk@dailian.co.kr)

<칼럼>명예로운 혁명 위해선 미래사회 합의 이뤄야

곁가지 폭로전보다 여론 수렴한 미래 방향성 제시를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4차 민중총궐기 촛불집회에 참석한 수십만의 시민들이 지난 19일 저녁 서울 광화문광장과 세종로 일대에서 촛불을 들고 청와대 방향으로 행진을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포스트 박근혜 시대’ 모습 어떻게 만들지 우리 사회 뜻 모아야

최근 황당한 기사가 하나 떴다. 어떤 평범한 20대 직장 여성이 방송사 기자를 사칭하며 박근혜 대통령과 ‘비선실세’ 최순실 씨의 단골 병원을 방문해서 박 대통령의 줄기세포 치료의혹에 관하여 병원장과 인터뷰까지 했다는 것이다. 결국 경범죄로 즉결심판에 넘겨진 이 사람은 최근에 불거진 의혹들의 사실여부가 너무나 궁금해서 이런 일을 벌였다고 털어놓았다 한다. 이 분의 행동이 지나친 것은 틀림없지만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의 다른 많은 사람들도 사실과 의혹이 온통 엉켜서 넘실거리는 혼돈의 바다에서 헤매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들을 이렇게 만든 데는 무엇보다 언론의 책임이 크다.

첫째, 지금이 서슬 퍼런 유신독재시대도 아니고, 대한민국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언론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비서실장을 비롯한 청와대 참모들이나 정부 고위 각료들, 그리고 여당인 새누리당의 지도자들이 최순실의 존재나 그녀의 국정농단 사실을 몰랐다고 하면 분명히 지나가던 소가 웃을 일이다. 그런데 이 말은 정보의 중심에 서있는 언론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국가의 주요 정책이 수립되고 집행되는 과정에서 무언가 이상 징후가 포착되면 무엇이 문제인지 신속 정확하게 취재하여 보도하는 것이 언론의 사회적 책임이 아니가? 자기가 누리는 사회적 위치에 안주하며, 막상 그 자리에 주어진 막중한 사회적 책임을 방기한 것은 시위소찬(尸位素餐)이 아니던가?

정말로 믿고 싶지 않지만, 만약에라도 살아있는 권력을 두려워했다면, 그들은 애당초 언론인이나 기자의 소임을 맡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다. 과거 선배들의 기개를 반만이라도 가졌으면 그럴 수 없는 일이다. 미국의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은 평생을 흑인노예 해방과 여성 참정권 획득을 위해 헌신한 언론인이었다.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시시때때로 그의 생명을 위협했고, 그를 밧줄로 묶어 거리를 끌고 다니기도 하고 감옥에 보내기도 했지만 끝내 그의 뜻을 굽힐 수는 없었다.

멀리 갈 일도 아니다. 이번 사태로 일제 강점기 우리 언론인들의 태도가 궁금하여 서가에 꽂혀있는 ‘조선일보 명사설 오백선’을 읽어보게 되었는데, 지금은 친일보수로 지목되고 있는 이 신문이지만 거기에는 당시 우리 언론인들의 신념과 용기가 그대로 전해지는 대목이 많았다. 예를 들면, 조선일보는 1920년 8월 27일 총독부에 의해 일주일간 정간을 당하고 9월5일 속간하게 되었는데, 이 속간 제1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긴 사설을 게재하였다. “이에 우리는 당국에 조처에 대하여 가장 냉정히 우리 사(社)의 과거를 반성하였도다.

즉, 우리 일보(日報)는 조선인의 불평을 창도하여 총독정치를 어느 정도 공격하였던가. 조선 독립운동의 사실을 선전하여 조선인의 정신을 얼마만큼 고취하였던가. 과연 우리는 이 의식을 포지하여 계속적으로 이를 위해 노력한 것은 사실이노라.” 스스로 배일신문(排日新聞)임을 인정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의 자유는 지켜져야 한다며, 조선일보를 정간 조치한 총독부 당국자를 우열(愚劣)한, 즉 어리석고 못난 사람이라고 조롱하였다. 이 사설로 인해 조선일보는 무기한 정간을 당했다.

두 번째, 요즈음 우리 언론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선진국이라면 ‘타블로이드 언론’에서나 취급할만한 선정적인 기사들로 지면을 도배하고 있다. 아니면 말고, 식의 확인되지 않은 루머성 기사를 게재하거나 맥락을 무시하고 취재원의 말이나 자료를 편집하고 가공해서 의혹을 부풀리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다.

정통언론을 자처하는 어느 주요 일간지가 ‘대통령과 최태민 관계’에 대해 사실을 오도하는 기사를 내놓고는 이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자 오보에 대한 사과 한마디 없이 슬그머니 인터넷에서 기사를 내렸다는 보도가 이러한 상황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아무리 작금의 사태가 심각하고 대통령의 잘못이 크다 하더라도 지금과 같이 무책임한 오보와 과장기사가 판을 친다면 결국은 부메랑이 되어 결국은 한국 언론의 집단적인 책임으로 돌아올 것이다. 오죽하면 ‘언론의 종언’이라는 표현까지 나오는가.

다시 일제 강점기 조선일보 사설로 되돌아가보자. 1928년 2월 4일자 사설은 “조선인의 언론기관은 영리를 목적하지 않고, 본래부터 정치적 무기의 사명을 띠고 건설된 것”이라고 강조하고, 따라서 “외국의 언론기관이 각 정당, 각 계급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투쟁의 무기인 것 같이, 조선인의 언론기관도 이러한 사명을 떠나서 존재할 사회적 근거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라고 주장했다.

사설은 또한, 그러므로 “사회의 목탁이니, 공론의 명경(明鏡)이니, 공평무사니 하는 등 객관적인 사실과는 전혀 착오된 인식으로 조선에서도 신문지를 상품화하거나 잡지장이의 잡지를 발행함은 조선의 현실을 무시함이 이보다 더할 수 없겠다”라고 일갈하였다. 시대가 달라지고 언론의 책임도 달라졌지만, 과연 우리 시대의 언론은 ‘존재할 사회적 근거’를 다하고 있는지 자문해 볼 일이다.

지난 5일 저녁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모이자! 분노하자! #내려와라 박근혜 2차 범국민행동' 에 참석한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촛불을 들고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촛불이 명예로운 혁명으로 귀결되기 위해선 미래사회에 대한 합의 이뤄야

그렇다면, 언론이 사회적 책임을 다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우리가 처한 사회적, 경제적 현실에 대해 우리 사회가 깊은 사회적 고민과 성찰에 이를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이번 사태가 어떤 방식으로 정리되건, 확실한 것은 이제 박근혜 정부는 종언을 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긴요한 과제는 ‘포스트 박근혜 시대’의 모습을 어떻게 만들어나가야 될지 우리 사회가 뜻을 모아야 하는 것이며, 이는 곧 광화문의 촛불을, 전국 각 지역의 촛불을 의미 있게 만드는 일이다. 사회 일각에서는 명예혁명, 시민혁명 등의 단어로써 현 상황을 표현하고 있는데, 박 대통령을 하야시킨다고, 탄핵시킨다고 그 자체가 혁명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근본적인 사회 변화를 동반하지 않는 사건을 우리는 혁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이번 사태의 본질은 단순하게 박 대통령의 리더십이나 비선실세의 국정농단에 있지 않다. 그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그렇다. 하나는 우리 사회가 성숙해진 결과 이제는 더 이상 사적인 관계가 공적 영역을 부당하게 침해하는 것에 대해 관용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며, 이를 근본적으로 예방하기 위해서는 개헌을 통해 '제왕적 대통령제'를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우리 경제 발전 수준에 맞춰 ‘경제 민주화’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정치권에서 입법 활동을 통해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 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중대한 과제를 앞에 두고 있는 우리에게 대통령 또는 청와대의 ‘약물 의혹’ 보도에 열을 내는 언론은 그 스스로가 청소의 대상임을 자인함에 다름 아니다.

영국의 17세기 내전을 더 이상 혁명으로 부르지 않는 이유는 그 혁명적 사건이 추구했던 목표가 미래 시점에 설정된 것이 아니라 동양의 요순시대처럼 ‘이상화된 과거(idealized past)’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원래 영국인은 모두가 평등하고 자유로웠는데, 노르만 정복 이후 이른바 ‘노르만의 멍에(Norman Yoke)’를 뒤집어쓰게 되었으므로 그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자고 했기 때문이다. 왕정복고를 내세운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혁명이라 하지 않는 이유도 이와 같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과거 청산에 매달리기보다 다가올 미래 사회를 바라보며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야만 촛불은 명예로운 혁명으로 귀결될 수 있다. 이 같은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려면, 언론은 더 이상 곁가지 폭로전에 편승할 것이 아니라 사회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여론을 수렴하고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혼돈의 시대, 위기의 순간일수록 발휘되어야 할 언론의 본질은 바로 그것이다.

글/허구생 단국대 교수·역사학 박사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기사 모아 보기 >
0
0
관련기사

댓글 0

0 / 150
  • 최신순
  • 찬성순
  • 반대순
0 개의 댓글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