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게 할수록 유리한 선거구획정, 현역들이 왜 법 지켜?
<기자수첩>스스로를 거세한 획정위, 느긋한 정치권, 침해당한 참정권
각설이도 아니고 다시 돌아올 때가 됐다. 4년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 것이다. 월드컵이나 올림픽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선거구획정 문제다.
내년 4월13일 치러지는 제20대 총선이 이제 6개월 앞으로 다가왔다. 더불어 여의도도 본격적인 총선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국정감사가 끝나기가 무섭게 지역구로 짐 싸들고 떠난 보좌진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매 4년마다 치러져 벌써 20회째를 맞는 국회의원 총선거이지만 이번 총선은 의미가 조금 다르다. 박근혜 정부 3년에 대한 중간 평가인 동시에 이듬해 있을 차기 대통령 선거의 전초전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헌재의 위헌 결정 때문에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은 ‘선거구획정위원회’라는 기구까지 만들어졌다. 하지만 선거구획정이 결국 법정기한을 지키지 못했다. 기존까지 정치권에서 갑론을박 끝에 획정했던 선거구를 이해당사자가 아닌 독립된 제3자에 맡기자는 취지로 만들었던 선거구획정위는 도리어 선거구획정에 대한 부담감을 떨치지 못하고 정치권의 눈치를 보면서 스스로의 독립성을 거세했다.
사실 애당초 획정위가 선거구를 획정하는 것은 무리였다. 9명인 획정위원의 구성은 여야의 추천으로 위원장을 제외한 4대4 동수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쉬움은 남는다. ‘법정기한’이라는 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김대년 선거구획정위원장은 입버릇처럼 “법정기한은 반드시 지키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법정기한은 헌신짝처럼 버려졌다.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소속 모 의원은 '데일리안'과의 통화에서 “법정기한은 아무런 강제성이 없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말장난에 불과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획정위원들은 정치권에 속한 분들도 아닌데 소신껏 하지 못하는 모습이 답답하다”고 토로했다. 정치인들의 밥그릇 싸움에 헌재의 위헌 결정도 결국 막판까지 끌다가 총선만 치루면 된다는 안이함이 녹아났다는 거친 비판도 덧붙였다.
선거구획정이 미뤄지면서 가장 이득을 보는 사람은 누굴까? 바로 선거구를 획정하고 자신들이 획정한 선거구에서 내년에도 뛰게 될 현역 지역구 의원들이다. 사실 현역 지역구 의원들은 선거구획정이 늦어지는 것에 대한 부담이 덜할 뿐만 아니라 이득이다. 획정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선거활동 기간이 줄어들고 이는 기존에 인지도와 지명도가 있는 현역 지역구 의원들이 절대적으로 유리해지기 때문이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선거구획정은 항상 그래왔듯 내년 2월이나 돼야 나오지 않겠느냐”면서 “그때 가서 급하게 선거구획정 되면 지금 싸우고 있는 공천룰이 다 무슨 소용이냐”고 말했다. 여든 야든 서로 이기기 위해선 단 시간에 최고의 효과를 낼 수 있는 기존의 지명도가 높은 인물을 낼 수밖에 없다는 계산이다.
당장 마음이 급해진 사람은 내년 총선을 준비하던 총선 예비 후보, ‘선수’들이다. 젖 먹던 힘까지 쏟아서 뛰어야할 운동장이 없기 때문이다. 운동장이 뒤늦게 만들어진다고 해도 이들은 그 운동장에 적응할 시간적 여유도 주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진짜 피해자는 따로 있다. 바로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할 ‘국민’이다. 선거는 내 지역을 대표해 잘 일할 수 있는 사람을 뽑는 행위다. 그만큼 자신이 가진 한 표를 오용하지 않고 현명하게 행사하려면 국민은 스스로가 후보들에 대해 알아보고 고민해 신중하게 선택하고 행사해야한다.
그런데 후보가 누군지, 후보들에 대해 알고 고민할 시간적 여유가 주어지지 않는다. 협의로는 국민의 선택권이 제한되는 것이고 광의로는 국민의 참정권이 침해당하는 것이다. 하지만 4년마다 ‘여러분을 대변하겠다’던 정치인들은 국민의 당연한 권리가 침해당해도 서로 눈치게임만 하고 있다. 아니, 어쩌면 속으론 더 침해당하기를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이 틈만 나면 지역구로 내려가서 얼굴을 비추며 자기홍보에 열을 올릴 때인지, 내 지역 주민들이 현명하게 소중한 한 표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선거구획정을 제대로 이뤄낼 때인지 국회의원들은 고민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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