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대의 이제는 품격>찌라시와 땅콩리텬의 닮은꼴
아무나 뽑는것보다 함부로 내치는게 진짜 갑질 왕질
인도에는 얼굴이 셋이고 팔이 여섯인 귀신을 아수라(阿修羅)라고 부르는데 싸움귀신이다. 하여 교만심과 시기심이 많은 사람이 죽으면 이 아수라가 사는 세계로 떨어져 영원히 싸움질을 하게 되는데 그곳을 아수라장이라 부른다. 지금 이 나라에서는 살인, 자살, 물어뜯기, 왕(王)질, 쩐(錢)질, 갑(甲)질, 완장(腕章)질이 난무하고 있다.
지난 연말에 각계에서는 2014년 한국사회를 정리하는 이런저런 사자성어들을 내세웠지만 벌써 다 잊었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고 ‘갑질’이란 단어만 계속 미리 속을 떠다닌다. 물론 국어사전에도 없는 신조어다. 그리고 이 ‘갑질’은 새해에도 계속 이어질 것 같다. 예전엔 무슨 분쟁이라도 생기면 ‘진보냐, 보수냐’로 편가르기를 했었는데, 요즘은 ‘갑이냐, 을이냐’부터 따지는 버릇까지 생겼다.
함부로 사람을 ‘자르는’ 대통령
많은 이들이 역대 대통령들의 용인술에 대해 비판을 많이 해왔다. 하지만 대통령의 파인술(破人術)에 대해서는 누구도 관심이 없다. 작년 6월 박 대통령은 러시아 출장 중인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외교전문을 통해 경질 통보함으로써 모욕적으로 ‘잘랐다’가 결국 ‘찌라시’사건 때 뒤통수를 얻어맞아 망신을 당했었다.
그런가하면 9월에는 음주 추태를 문책한다며 신현돈 1군사령관을 말 한 마디로 ‘잘라버렸다.’ 물론 이렇게 즉석에서 ‘사람’을 자르는 일이 비단 이번 대통령만이 아니라 이전에도 수없이 있었던 일이다. “너, 내려!”라며 ‘땅콩 리턴’시킨 조여사와 다를 바 없는 ‘왕(王)질’이라 하겠다.
이왕 ‘버릴’ 사람이라고 그렇게 매몰차게 쫓아내서 남은 이들에게 무슨 득이 있는가? 동네 거지를 내칠 때에도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는 법인데 하물며 국가를 위해 봉사한 사람을 앉은 자리에서 말 한 마디로 내쳤다. 정(情)을 갈무리 잘못하면 한(恨)이 되는 법. 지나치게 감정적인 한국인들의 한(恨) 중 상당 부분은 이같이 사소하기 짝이 없는 섭섭함이 만들어낸다.
인격(人格) 없인 품격(品格) 없다
사람을 내치는 것도 매너의 문제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지난 28일 워싱턴DC 근교 메이어-헨더슨 기지에서 열린 척 헤이글 장관 이임식에서 “약 50년에 걸쳐 국가에 봉사하는 삶을 산 진정한 애국자”라고 칭찬했다. 자신이 이라크를 방문했을 때 헤이글 장관이 침실용 슬리퍼를 신고 모래땅으로 나왔던 일을 비롯해 여러 일화들을 회고하며 “그의 도움으로 새로운 신뢰를 건설했다”고 치하했다.
이에 헤이글 장관은 오바마 대통령에게 "매우 어려운 시기에 강한 지도력을 보인데 대해 감사한다"고 답했고, 이임식에 참석한 군 장병들에게 "여러분이 내 동반자였던 점을 행운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대통령과의 이견으로 사실상 해임이었지만 오히려 최대한의 격식을 갖추어 마무리 한 것이다.
인격을 물격으로 보는 한국인들은 ‘자른다’라는 말을 흔히 쓴다. 물론 요즘은 함부로 ‘자르지’는 못하지만 권력은 여전히 ‘사람’을 자를 수 있다. 하긴 권력의 진정한 의미가 바로 ‘사람을 자를 수 있는 힘’이 아닌가? 그렇지만 팽(烹)을 시키더라도 입발림 성명이라도 내어 최소한의 예(禮)는 갖춰야 한다. 상대의 인격을 존중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자신과 조직의 품격을 위해서도 그렇다.
한국인의 잠재의식, 왕(王)질
한국인의 무의식, 아니 의식에는 봉건적 사고가 뿌리 깊이 박혀 있는 것 같다. 바로 ‘왕질’이다. 역사를 통해 배웠든, 엉터리 사극을 보고 익혔든, 어쨌든 한국인들은 습관적으로 커다란 의자만 봐도 대왕님 폼을 잡고 앉는다. 이 땅에 백백교(百百敎)가 번성하는 것도 교주가 되어 왕질을 해보고 싶은 욕망 때문이 아닐까? 해서 저들만의 ‘왕국’을 건설코자 발버둥 치는 것이겠다. 아무렴 제 조상이 왕이었던 사람은 별로 없었을 테니, 분명 천민 콤플렉스에서 생겨난 강박증이겠다.
하여 한국 드라마에서 회장님은 하나같이 조폭 두목이다. 부하들 시켜 뻑하면 미운 놈 뒷조사 시키고, 잡아 가두어 죽도록 패는가 하면, 무릎 꿇이고 심지어 죽이기를 밥 먹듯 한다. 게다가 한국 남성은 그럴듯한 자리 하나 차지하면 거의 예외 없이 변학도가 된다. 싫다는 여성을 막무가내 ‘제 것’으로 만들겠다며 오기를 부린다. 한국 드라마의 기본 코드가 <성춘향>과 <심순애>다. 이런 가학적인 드라마에 한국인들은 부지불식간에 짐승남이 되어버린다. 아직 봉건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이다.
사람을 물격(物格)으로 보는 한국의 졸부들. 대통령이나 재벌 회장이나 왕질에서는 하나도 다를 바 없다. ‘고객은 왕이다’는 말을 금과옥조로 삼아 서민들은 서민들대로 기회만 닿으면 왕질을 하려 든다. 근본이 하인근성이다. 그렇지만 백수의 왕 사자나 호랑이도 함부로 갑질하지 않는다. 과연 옛날 임금님이라고 해서 용상에 쩍 벌리고 앉아 호통 치며 제 눈에 거슬리는 놈은 무조건 잘랐을까?
부자 삼대 어려운 건 갑(甲)질 때문
북한의 김 씨 세습왕조를 나무랄 자격도 없이 한국의 재벌, 대기업은 말할 것도 없고 교회까지 공공연하게 세습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교수, 연예인, 판검사, 외교관, 국회의원 등 각계도 갖은 방법으로 세습을 고착화 시켜나가고 있는 중이다. 흡사 한국사회가 봉건시대로 회귀하고 있는 것 같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해방 후 자주 독립을 외쳤지만 진정한 자주정신, 주인정신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저 남 따라 경제성장하고 민주화 되면 우리도 주인이 되는 줄 알았다. 해방 후 급속하게 밀려들어온 미8군 양키문화, 저급한 미국대중문화인 LA문화를 보고 따라하다가, 70년대 후반 일본식 친절 굽신 서비스를 별 생각 없이 받아들여 부지불식간에 종복문화가 몸에 배어버렸다. 그 바람에 우리 사회를 지탱하던 양반문화는 한복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갑(甲)은 을(乙)이 만든다. 스스로 인격임을 포기하고 물격 내지는 동물격도 마다하지 않는 주변머리 을(乙)들의 종복 하인 근성도 문제다. 아무렴 인간사회에서 갑을 관계가 없을 수는 없다. 다만 갑이면 갑답게 살자는 것이겠다. 다시 말해 갑이면 갑다운 품격을 갖출 것을 요구한다는 말이다. 을 또한 마찬가지다. 비즈니스 협상이라면 상대적 열세를 매너와 품격으로써 극복해낼 수 있어야 한다.
인간존엄성과 인격(人格)
얼마 전 뉴스에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혼수상태에 빠졌던 남성이 12년 만에 회복해 어엿한 사회인으로 성장한 이야기가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마틴 피스토리우스라는 남성은 12살 때 희귀병인 '크립토콕쿠스 뇌막염'을 앓아 의식불명에 빠졌다. 부모의 극진한 간호로 2년 후 의식은 깨어났지만 그걸 가족들에게 알릴 방도가 없었다.
다행히도 의식이 돌아온 지 10년이 지난 스물네 살에 그의 뇌는 완전한 기능을 되찾았다. 비록 휠체어에 의지하지만 마틴은 현재 웹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으며, 단란한 가정을 꾸려 행복하게 살고 있다. 그는 자신이 갇힌 몸에서 벗어난 원동력을 ‘존엄성’이라고 했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기적적으로 회복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그러니까 12살 이전에 그는 이미 ‘인간존엄성’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안데르센 동화에 <두 처녀>라는 짧은 작품이 있다. 자갈로 길을 포장할 때 사용하는 ‘달구’라는 도구가 있었다. 단단한 나무로 아래쪽은 넓고 철끈으로 단단하게 둘러져 있으며, 가늘고 긴 꼭대기에는 두 개의 팔이 튀어나와 있다. 포장공들이 이 두 팔을 잡고 들었다 놓았다를 하며 자갈을 다진다. 예전에 덴마크에서는 이 달구를 ‘처녀’라고 불렀다.
한데 어느 날 도로국에서 이 ‘처녀’ 대신 ‘달구’라는 정식 명칭으로 부르기로 하였다고 한다. 연장 창고에 있던 두 처녀는 이 새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처녀는 사람한테 붙이는 이름이고, 달구는 물건에 붙이는 이름이지. 우린 물건 취급을 받을 수 없어. 이건 모욕이야! 그럴 바에는 차라리 쪼개져서 땔감이 되는 게 나아!”
같은 창고에 있던 수레며, 측량기 등이 새 이름을 받아들이는 것이 순리라고 설득했지만, 두 처녀는 자기들끼리 부를 때에는 항상 “처녀”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그 중 나이 어린 처녀는 ‘달구’라는 이름으로 바뀌는 바람에 항타기(杭打機, 말뚝 박는 데 쓰는 커다란 망치)와의 약혼까지 깨어져 계속 처녀로 남았다고 한다.
‘인간성 회복’이 아니라 ‘인간존엄성’에 대한 인식부터
한국인들은 한자의 인(人)을 사람이라 해석하고 여기에 자기중심적인 세계관이 배어있다. 하지만 한문에서 인(人)은 자기가 배제된 타인(他人)을 뜻한다. 자기는 아(我)라 하고 자기 중심적인 생각을 아집(我執)이라 한다. 따라서 인간(人間)이니 인문(人文)이니 하는 것도 모두 사람, 즉 타인과의 관계를 말한다. 인권 역시 개인이 ‘독립된 개체’로서 요구하는 권리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인정해 주는 권리이다.
청와대 ‘찌라시’ 사건과 대한항공 ‘땅콩 리턴’ 사건은 너무 닮았다. 내부 문제가 밖으로 삐져나온 것도 그렇고 둘 다 품격의 문제다. 사건 처리 과정 역시 무리수를 두다가 더 크게 벌렸다. 공히 집안 망신에다 국가 품격 디스카운트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후진국 시절에는 무매너라 해도 변명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후진국이 아니다. 국제사회에서 더 이상 용납 되지 않는다. 진정한 ‘황제경경’이란 곧 품격경영이다.
글/신성대 도서출판 동문선 대표
©(주) 데일리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