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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준에겐 없고 신화 앤디에겐 있는것은?


입력 2013.10.11 10:41 수정 2013.10.11 10:49        김지영 기자

<기자수첩>지도층 2세 병역 면제위해 국적 포기 '씁쓸한 자화상'

2007년 4월 영국 왕위 계승 서열 3위인 해리 윈저 왕자의 이라크 파병 문제를 놓고 영국이 논란에 휩싸였다. 같은 달 12명의 영국군이 이라크에서 전사했고, 이라크의 한 무장단체는 해리 왕자를 납치해 살해하겠다고 공언했다. 결국 해리 왕자는 파병을 원했음에도 영국 육군 참모부는 5월 계획을 철회했다.

하지만 해리 왕자의 파병 철회는 더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최고 지도층인 왕실의 도덕적 의무를 망각한 행위라는 비난이 들끓었다. 왕자의 목숨만큼 다른 국민의 목숨도 소중하고, 안전을 이유로 꽁무니를 빼는 모습이 이라크 현지 장병의 사기를 떨어뜨릴 수 있단 이유였다.

앞서 엘리자베스 여왕의 차남 앤드루 왕자는 1982년 포클랜드 전쟁에 대잠수함 공격용 헬리콥터 조종사로 참전해 임무를 수행했다. 할아버지인 필립공은 제2차 세계대전 때 해군으로 복무한 바 있다. 같은 관점에서 해리 왕자의 행동은 비겁하기 그지없었다. 그만큼 영국 왕실에 대한 도덕적 잣대는 엄격하다.

이는 영국 왕실에만 한정된 사례가 아니다. 1·2차 세계대전 때 영국 고위층 자제들이 다니던 이튼칼리지 출신 중 2000여명이 전사했으며, 6·25 전쟁 때는 미군 장성의 아들 142명이 참전해 35명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입었다. 이들에게 도덕적 의무는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전제조건과 같았다.

하지만 모든 국가에서 사회 지도층의 도덕적 의무가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사회적 지위를 이용해 의무를 회피하고, 다른 누군가는 가진 게 많을수록 지키려한다. 남의 이야기도 아니다. 세계 15위 경제대국, 개발도상국의 롤모델로 추앙받는 대한민국 고위공직자들의 이야기다.

정부 산하 기관장을 비롯한 고위공직자 15명의 아들 16명이 한국 국적을 포기해 병역을 면제받은 것으로 알려지면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강원도 철원군 6사단 DMZ 철책에서 육군 장병들이 경계순찰근무를 하고 있다.ⓒ연합뉴스

대한민국 공직사회에 노블리스는 있지만 오블리주는 없다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안규백 민주당 의원이 지난 9일 병무청 등으로부터 제출받은 ‘고위공직자 직계비속 중 국적상실 병적 제적자 명단’에 따르면 정부 산하 기관장을 비롯한 고위공직자 15명의 아들 16명이 한국 국적을 포기해 병역을 면제받았다. 공직자 본인과 아들 2대에 이어 병역을 기피한 경우도 있다.

여기에는 유민봉 청와대 국정기획수석비서관, 신중돈 국무총리실 대변인, 신원섭 산림청장, 강태수 한국은행 부총재보 등이 포함됐다. 취득한 국적도 한결같다. 13명은 미국, 3명은 캐나다 국적을 얻었다. 이 가운데, 미래창조과학부 소속 한 서기관은 두 아들 모두 캐나다 국적을 취득케 해 병역을 면제받았다.

또 고위공무원 등 공직자 181명은 최초 신체검사에서 현역 입영 대상자 판정을 받았다가 재검사를 통해 제2국민역 등 병역 면제에 해당하는 판정을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사법부 51명, 입법부 21명 등 입법·사법·행정 3개 국가권력기관에 속해있는 4급 이상 공직자 253명이 같은 방식으로 병역을 면제받았다.

더불어 심재권 민주당 의원은 10일 외교관 자녀의 국적 현황을 공개했다. 자료에 따르면 외교관 자녀 중 130명은 이중국적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들 중 90.8%(118명)는 미국 국적을 보유하고 있다.

이와 관련, 외교부 측은 “대사관 근무가 아닌 미국에서 연수중이거나 총영사관에서 근무할 때 자녀가 출생하게 되면 미국 속지주의 관계로 미국 국적이 부여된다”고 설명했다. 우리나라 외교관 중 90% 이상은 미국 근무기간, 혹은 제3국 연수를 앞둔 미국 연수기간 1년 동안 출산한다는 어처구니없는 해명이다.

비단 병역 문제에만 한정할 사안도 아니다. 인사철만 되면 부동산 투기, 다운계약서, 세금탈루, 공금횡령, 불법 정치자금 수수 등 공직 후보자들을 둘러싼 각종 비리들이 쏟아져 나온다. 의혹에 직면한 공직 후보자들은 하나같이 “기억나지 않는다”, “법적으론 문제가 없다”, “잘 몰랐다”고 답한다. 참 뻔뻔하다.

가장 악질적인 대응은 법적으론 문제가 없다는 것. 병역기피를 목적으로 두 아들의 국적을 포기케 한 서기관도 이처럼 답했다.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죄의식 자체가 없다고밖에 해석할 수 없다. 일반 국민들은 무조건 지켜야 하고, 지키지 않으면 큰일 나는 줄 아는 당연한 의무들을 너무나 쉽게 피해간다.

일반적인 도덕적 의무가 지위·권리의 정당성을 보장하는 수단이라면 우리나라의 도덕적 의무는 지위·권리를 가지면 버릴 수 있는 수단이 아닐까 싶다. 사회에 노블리스는 있지만, 오블리주는 없다.

병역이 특히 그렇다. 일반 국민이 대한민국의 일원으로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행하는 의무를 누군가는 더 큰 권력을 갖게 되면 당연히 버려야 할 짐으로 치부한다. 온갖 특혜를 누리며 대한민국의 지도층으로 살아가면서도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자격은 갖추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노블리스가 그렇다.

또 최근 NLL(북방한계선) 논란, 북한의 연이은 도발 등으로 안보불안이 증대되고 있는 가운데, 사회 지도층이라고 일컫는 고위 공직자들의 병역기피는 일반 국민에게 박탈감을 안겨줄 수밖에 없다.

누리꾼들이 흔히 쓰는 말로 ‘까방권(까임방지권)’이 있다. 사회적으로 용인될 범주에서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 비판을 피해갈 수 있는 권리다. 까방권의 주체는 없다. 다만 남자 연예인의 경우 당당하게 병역 의무를 마쳤을 때, 근무 환경이 어려운 부대에 자원해 성실히 군생활을 수행했을 때 까방권이 주어진다.

까방권을 가진 대표 연예인이 그룹 신화의 앤디다. 미국 한국켄트외국인학교를 졸업한 앤디는 본래 미국 영주권자였다. 하지만 한국에서 가수로서 활동하기 위해 미국 영주권을 포기한다. 이후 외국인학교 학력이 고졸로 인정되지 않아 4급 판정을 받았으나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 재검을 통해 현역으로 입대했다.

반대로 권력을 틀어쥐고 대한민국 움직이는 지도층은 더 큰 권력을 얻을수록 더 많은 의무를 버린다. 대한민국의 지도층은 되고 싶지만, 대한민국 국민은 되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단지 국내 경제활동을 위해 대한민국 국민이 된 대중가수의 애국심이 빛바랜 것 같아 한숨만 나온다.

김지영 기자 (jy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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