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000명 내보내며 조직 슬림화 했는데...
1719명 직접고용 강제당하면 회사 존폐 위기
GM 약속 기한 5년 남아…정규직 8000명 실업자 될 수도
2018년 한국 철수 직전까지 내몰렸다 제너럴모터스(GM) 본사와 산업은행의 지원으로 기사회생했던 한국GM이 또다시 큰 난관에 봉착했다. 이번엔 실적 부진이 아닌 고용 관련 리스크가 위기 요인이다.
13일 업계에 따르면 한국GM은 현재 하도급 근로자들로부터의 민사소송, 불법파견과 관련된 형사소송, 고용노동부의 직접고용명령 등 다각도로 하도급 근로자 채용 압력을 받고 있다.
하도급 근로자들이 제기한 근로자지위확인소송만 30여건이 진행되고 있고, 형사소송은 2018년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됐다 보강수사 지시, 2020년 재기소를 거쳐 회사와 카허 카젬 전 사장, 임원 3명, 도급업체 20여곳 등이 무더기 기소된 상태로, 1심 판결을 앞두고 있다.
고용노동부가 2018년 직접고용명령을 내린 하도급 근로자 수는 무려 1719명에 달한다. 이 중에는 부평, 창원공장 뿐 아니라 이미 문을 닫은 군산공장에서 일했던 이들도 있고, 적법한 하도급이라는 데 논란의 여지가 없는 KD(반조립 부품) 포장 라인 근무자들도 상당수다.
고용노동부가 지목한 인원 외에도 직접고용을 요구하는 하도급 근로자까지 포함하면 2000명을 넘어설 것으로 추산된다.
생산 차종 축소와 판매 감소로 기존 8000여명의 정규직 근로자 수를 유지하는 데도 부담이 큰 상황에서 하도급 정규직 채용 문제는 한국GM에게는 회사의 생존을 좌우할 만한 리스크다.
한국GM은 2014년부터 지난해까지 매년 수천억원의 적자를 내고 있는 회사다. 규모의 경제를 갖춘 현대차‧기아에 밀려 내수시장 점유율은 급락했고, GM의 RV‧전기차 중심 포트폴리오 전환 정책으로 인해 미국 등 해외로 수출하는 물량도 예전만 못하다. 기존 한국GM의 주력이었던 세단 라인업은 글로벌 GM 차원에서 단종 수순을 밟고 있다.
2018년 군산공장 폐쇄 사태도 이 때문에 벌어졌다. 생산물량이 없는 상태에서 2000여명 규모의 직원에게 임금만 지불하며 3년을 버티다 결국 폐쇄했다.
군산공장 폐쇄와 함께 부평, 창원공장에서도 인력 구조조정을 실시해 총 3000명가량을 내보냈다. 기존 규모를 유지해서는 도저히 적자 구조를 탈피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조직을 슬림화한 것이다.
이런 가운데 다시 2000여명의 근로자를 고용하라는 건 할 일도 없는 이들에게 계속 임금을 지급하면서 적자 구조를 가져가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나마 GM에서 산업은행과의 ‘2018년 합의’에 근거해 한국GM에 생산을 배정한 트레일블레이저와 내년부터 생산되는 차세대 CUV 차종을 앞세워 올해 손익분기점에 도달하고 내년부터는 흑자를 달성한다는 목표를 세워놓고 있지만, 하도급 직접고용이 강제된다면 목표 달성은 기약할 수 없다.
한국GM 사정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현재 한국GM의 가장 큰 위기 요인은 반도체 수급난에 따른 생산차질도, 판매 부진도 아닌 하도급 근로자 고용 관련 사안”이라며 “글로벌 GM의 지원을 통해 진행 중인 회생 플랜 자체가 뒤흔들릴 만한 리스크”라고 말했다.
재계에서는 한국GM의 상황이 우리나라의 고용 경직성 문제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는 지적이 나온다. 제조업은 업황에 따라 일감이나 실적에서 기복이 있게 마련이고, 그에 따른 인력 수요 변화도 큰데, 일단 하도급 근로자가 공장에 들어와 일을 하면 직접고용 리스크가 발생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재계 한 관계자는 “사업 정체기에 들어선 기업은 생산과 인력 수요에 변화가 생길 경우 하도급법에 의한 하도급 근로자 활용으로 완충을 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파견법을 너무 넓게 해석해 하도급법과 상충되고, 경계가 불분명하다”면서 “이런 리스크가 계속된다면 기업들이 버티질 못해 제조업 공동화(空洞化) 현상이 가속화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실제 한국GM 외에도 현대차‧기아, 포스코 등 여러 제조기업들이 하도급 근로자들과의 소송에 휘말려 있다. 그나마 대기업들은 리스크에 버틸 만한 체력이 있지만 한국GM과 같이 기업 규모가 크지 않은 곳은 하도급 근로자 직접고용 여부에 명운을 걸어야 한다.
더구나 외국계 기업이라면 이익이 나지 않으면 사업을 접는 결정도 쉽게 내릴 수 있다. 카허 카젬 전 한국GM 사장은 한국을 떠나기 직전인 4월 27일 ‘제20회 산업발전포럼’에 참석해 한국에 대한 지속적 투자 결정을 방해하는 요소로 ‘불확실한 노동 정책’과 ‘파견 및 계약직 근로자 관련 불명확한 규제로 인한 불확실성 확대’를 꼽았다.
한국에서 오랜 기간 사업을 이끌어온 외국 기업인의 이같은 발언은 단순한 ‘의견’이 아니라 ‘경고’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글로벌 관점에서 한국이 사업을 영위하기에 적합한 환경을 제공하고 있지 않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GM은 이미 한국 철수를 고려했던 기업이다. 한국에서 사업을 지속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된다면 다시 떠나겠다는 마음을 먹을 수 있다. 산업은행과 약속한 10년(한국 사업 지속 보장 기간)까지 불과 5년 남았다. 2027년까지도 한국GM의 적자 구조가 지속된다면, 그것도 하도급 근로자 강제 고용이라는 외부적 요인에 의해 그렇게 된다면 더 이상 한국에 잡아둘 명분이 없다.
결국 하도급 근로자 직접고용 요구가 8000여명의 한국GM 정규직 근로자들의 일자리까지 위협하는 상황이다. 회사가 사라지면 고용보장을 요구할 곳도 없어진다.
재계 한 관계자는 “기업은 고용을 창출하지만, 고용을 창출하기 위해 기업이 있는 것은 아니다. 기업은 수익을 창출해야 존재 의미가 있다”면서 “도저히 수익을 낼 수 없는 구조임을 알면서도 무조건 고용을 강제했다가는 더 큰 고용대란을 불러올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