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의료노조 "특약 보면, 1년 동안 퇴사도 이직도 할 수 없는 노예계약"
"근로계약서 통해 근로자 강제 근로 시킬 수 없어…원하는 시기에 퇴사할 자유 있어"
남자친구 "반복되는 야간·밤샘 근무로 야위어가…꺼져라 소리 듣고, 볼펜 던져 얼굴에 맞고"
60일 뒤에나 퇴사가 가능하다는 상사의 답변 듣고, 남자친구와의 통화 중에 극단적인 선택
지난 16일 의정부 을지대병원 소속 간호사 A씨가 병원 기숙사에서 극단적 선택으로 숨졌다. 입사 당시 A씨는 병원과 노동법을 위반한 근로계약을 맺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전문가들은 계약서의 특약사항이 근로자에게 근무를 강제하고 있어 근로기준법 위반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숨진 간호사의 남자친구는 언론인터뷰를 통해 여자친구가 간호사들이 겪는 직장 내 집단괴롭힘, 태움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라며 "상습적으로 모욕과 괴롭힘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보건의료노조)은 23일 "철저한 진상조사와 재발방지 대책 마련을 위해 유가족과 끝까지 함께 할 것"이라며 가해자 처벌, 고인에 대한 직무상 재해 인정, 괴롭힘과 노예계약에 대한 특별근로감독 실시 등을 촉구했다.
보건의료노조는 "의정부 을지대병원의 근로계약서 특약을 보면 1년 동안 퇴사할 수 없고 다른 병원으로 이직도 할 수 없도록 돼 있어 '노예 계약'과 다름없다"고 지적했다. 또한 계약서 12번 항목에는 5개의 특약사항이 담겨있는데 노동자에게 근무를 강제하고 있어 근로기준법 위반이라고 노조는 설명했다.
보건의료노조가 공개한 근로계약서는 '근로계약자는 사용자의 계약해지 등이 없는 한 계약체결일로부터 최소 1년 근무할 의무가 있다'(1항)고 명시하고 있다. 3항에는 '근로자가 사직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최소 2개월 전에 사직서를 제출하여야 한다'고 규정돼 있다. 또 계약서 4항은 '근로계약자가 1~3항을 위반해 병원에 손해 및 추가비용이 발생하는 경우 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며 1~3항 이행을 강제하도록 하기 위한 배상책임도 명시하고 있다.
권두섭 변호사는 "근로기준법엔 강제 근로 금지 원칙이 있어 근로계약서를 통해 강제로 근로자를 근로시킬 수 없다"며 "사직한다고 해서 근로계약서를 근거로 개인에게 책임을 묻거나 강제로 근로를 강요할 수는 없다고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권 변호사는 "간혹 근로자가 사직하려고 하면 회사 업무에 지장을 줬다는 이유로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는 경우가 있다"며 "당일 아침에 퇴사하겠다며 회사에 갑자기 안 나오거나, 그만두려고 할 때 자신이 없으면 안 되는 업무가 있어 회사에 직접적 손해가 생기는 등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근로자 개인이 그만둬 회사가 손해를 볼 거라고 보기는 힘들다"고 강조했다.
최여울 노무사 또한 "1·3·4항 모두 노동법적으로 문제가 된다"며 "1항과 3항은 강제 근로에 해당할 여지가 있고 최소 2개월 전에 사직하겠다고 말해야 하는 것도 과도한 규정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이어 "조기 퇴사할 경우, 일정근무 기간을 못 채운 경우 위약금을 물겠다고 하는 것은 근로자 입장에서 충분히 두려움을 느낄 수 있는 조항"이라고 덧붙였다.
최혜인 노무사는 "만약 회사의 지원으로 해외연수 또는 대학원을 간다면 회사에서 일종의 투자를 하는 것이기에 돌아와서 최소 2년은 근무해야 한다는 식으로 의무 복무 기간을 두기도 하는데, 만약 이 기간을 채우지 않고 퇴사하면 학비를 돌려내는 식으로 계약을 체결하기도 하지만 이런 상황에 해당되지 않는다면 의무 복무 기간을 두는 것 자체가 위법하다"고 설명했다.
최 노무사는 "근로자는 원하는 시기에 퇴사할 수 있는 자유가 있는데 이를 막는 강제 규정이 있고 계약을 지키지 않았을 때 손해배상을 해야 될 것처럼 계약돼 있는 만큼 법을 모르는 근로자 입장에서는 퇴사를 절대 할 수 없는 것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근로계약을 맺는 근로자 스스로 노동법과 관련해 기초 지식을 쌓고 불합리한 점이 있다면 전문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자세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최혜인 노무사는 "고용노동부는 법이 개정되면 개정된 사항까지 반영해 표준 근로계약서를 만들어 제공하고 있다"며 "사업장이 이러한 계약서를 사용하면 좋고, 개인이 회사의 자체 근로계약서로 체결한다고 하더라도 근로계약서에 반드시 포함돼야 할 내용, 불필요한 내용 그리고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구분할 수 있겠끔 노동법 관련 기본적인 지식을 쌓는 것도 좋다"고 조언했다.
최여울 노무사는 "사실 이런 위법한 조항들은 애초에 법을 위반하고 있기 때문에 근로자들이 계약서에 서명했다고 하더라도 무효인 게 맞다"며 "다만 근로자들이 '이러한 조항들이 있기 때문에 내가 그만둘 수 없겠구나' 생각해 쉽게 포기하게 되는데, 근로자 본인에게 부당한 게 있다고 생각되면 전문가에게 상담을 받아보는 것이 좋다"고 권고했다.
권 변호사는 "취업시 사업주가 내용상 문제가 있는 근로계약서를 제시하더라도 바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노동자 개인은 거의 없고 하기도 힘들다"며 "회사 내에서 구조적으로 이를 예방하거나 문제가 생겼을 때 제도 개선을 요구할 수 있는 노조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의정부 을지대병원은 근로계약서 특약에 대해 "갑작스러운 결원에 의한 업무 공백은 기존 인력에게 업무 부담을 주고, 그로 인해 추가 사직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며 "이러한 악순환은 환자 생명 및 안전 위협에 직결될 수 있어 서면으로 경각심을 주기 위해 해당 특약사항을 기재했지만, 실제로 당사자가 원할 경우 기한에 상관없이 모두 사직처리 했고 추가적인 책임을 부여한 바 없다"고 주장했다.
한편, 생을 마감한 간호사 A씨의 남자친구는 27일 공개된 언론인터뷰에서 A씨에 대해 “반복되는 야간·밤샘 근무에 시달리며 밥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해 날이 갈수록 야위어갔다”며 토로했다.
이 남자친구는 특히 “여자친구가 '이제 퇴근해보겠다'고 얘길 했는데 ‘너 같은 애는 필요 없으니까 꺼져라’라며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혼냈다. 한번은 볼펜을 던져서 본인 얼굴에 맞았다"며 여자친구가 당한 ‘태움’의 구체적인 상황을 밝혔다.
남자친구에 따르면 A씨는 근무가 끝나면 늘 울면서 전화를 했고, 남자친구가 "그만두고 우울증 치료도 받자”고 설득했지만 "1년은 채우고 싶고 경력진료 기록이 남으면 나중에 간호 쪽에서 일할 때 피해를 볼 수도 있다"며 거부한 것으로 전해졌다.
A씨는 다른 병동으로 옮기는 것마저 무산되자 퇴사를 결심했는데, 상사는 60일 뒤에나 퇴사가 가능하다고 했고, 결국 남자친구와의 통화 중에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