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의 춤판을 잊지 못하는 듯
통일외교안보 라인 同色으로
정의용 외교부 장관 후보자는 지난 5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북한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가 아직도 유효하다고 밝혔다. 그러니까 자신이 2018년 3월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정은으로부터 완전한 안전보장을 전제로 핵무기를 포기할 수 있다는 발언을 직접 들었는데 그 의지가 여전하다는 것이다(궁예의 觀心法을 떠올리게 한다).
김정은으로부터 정확히 어떤 말을 들었는지는 확인할 방법은 없으나 어쨌든 그가 말한 ‘비핵화 의지’는 2018년의 남북정상회담,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의 결정적 동인(動因)이 됐다.
그때의 춤판을 잊지 못하는 듯
그해 3월에 국가안보실장이던 정 후보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김정은의 초청장을 전달했고 트럼프는 ‘순간적인 충동’으로 이를 수용했다. 그 초청장은 정 후보자의 제의로 김정은이 보낸 것이었다. 존 볼턴 당시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자신의 회고록에서 기술한 바로는 그렇다.
특히 눈길을 끄는 부분은 “모든 외교적 춤판(판당고 fandango)은 한국이 만든 것이었고, 이는 김정은이나 우리의 진지한 전략보다는 한국의 통일 의제에 더 연관된 것이었다”는 부분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정 후보자가 자기들 목적을 위해 만든 춤판이었다는 뜻으로 읽힌다. 진실이 그런 것이라면 트럼프나 김정은은 춤꾼으로 초대된 것에 불과했다는 뜻이 된다.
정 후보자는 (의도적이었다고 보이지만) 서로 오해할 만한 신호를 양측에 전했다. 북측엔 ‘완전한 체제 보장’, 미국 측엔 ‘완전한 비핵화’였다. 이건 애초에 결렬이 예비 된 합의 조건이었다. ①누가 먼저 실천할지를 정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②동시에 실천한다는 합의도 가능한 게 못 된다. 서로 상대를 신뢰할 수 있는 실적도 근거도 없기 때문이다. ③‘완전한 안전보장’, ‘완전한 비핵화’ 또한 문자(文字)로만 가능하다.
이런 합의가 이뤄진다면 그건 불이행이 전제된 서류 조각에 불과하다고 봐야 한다. 북한의 체제 안전을 완전히 보장할 방법이란 있을 수 없다. 북한이 수십 년간 지속해왔고, 결코 중단한 적이 없는 핵 개발을 ‘완전히’ 포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망상이다.
그런데도 정 후보자는 춤판을 벌이는 데는 성공을 했다. 그리고 이를 고리로 해서 문 대통령은 세 번에 걸친 남북정상회담을 가질 수 있었다. 모양새가 아주 우습게 되기는 했지만 판문점에서 트럼프, 김정은과 함께 셋이 모인 장면을 연출하는 데도 성공했다(사실은 싱가포르에서, 하노이에서, 하다못해 판문점에서라도 ‘3자회담’을 갖는 퍼포먼스를 간절히 원했지만 그건 미국과 북한 측의 거부로 무산되고 말았다).
정 후보자의 기지(機智) 혹은 간지(奸智) 덕분에 문 대통령은 평화의 사도, 통일의 개척자 위상을 얻게 된 듯이 여겨졌다. 그는 ‘한반도 운전자’론을 내걸고 기세를 올리기도 했다.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의 언론들이 ‘노벨 평화상’ 후보로 점찍으면서 꿈에 부풀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문 대통령의 꿈은 허황했고 정 후보자의 방법론은 황당했다. 그래서 아무런 소득도 올리지 못한 것 아니겠는가.
통일외교안보 라인 同色으로
그런데도 문 대통령은 김정은과의 ‘민족적 결속’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그간 그렇게 비난 모욕 조롱을 겪었으면서도 희망을 이어가려 안간힘을 쓰는 분위기다.
“‘판문점 도보다리의 추억’(볼턴은 “4‧27 판문점회담은 올리브 가지를 입에 문 비둘기들이 날아다니지만, 실질적 내용은 거의 없는 DMZ 축제였다”고 평가했었다), ‘평양 5‧1경기장 연설의 환희’여 다시 한번!”
그런 심정으로 정 후보자를 외교부 장관으로 기용했을 법하다. 물론 이념적 성향 및 지향성을 공유하고 있는 지지자들에게 한반도 평화와 남북정권 간의 공존·공영을 위한 노력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장관 인사를 통해서도 보여주고자 했을 것이다.
정 후보자의 ‘북한 비핵화 의지’ 발언에 대해 미국 국무부는 “북한의 핵·탄도미사일과 관련 고급 기술을 확산하려는 의지(willingness)는 국제평화와 안보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고 지구적인 비확산 체계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고 입장을 밝혔다. 미 국방부의 반응도 유사하다. 북한을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미국 전문가들도 우려를 표하고 있다는데 그중에서도 로버트 아인혼 전 국무부 비확산군축 담당 특별보좌관의 말이 인상적이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그는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은 신뢰할만한(convincing) 증거 없이 트럼프 행정부에 김정은이 비핵화 추구에 진지하다(sincere)고 주장했다. 북한과의 조속한 관여를 희망하며 바이든 행정부에 또다시 그런 주장을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북한의 비핵화, 남북 관계 개선이 반짝하는 아이디어와 요란한 이벤트로 가능해질 일이 아니다. 그간의 거듭된 경험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그런데도 문 대통령은 외교·안보 진용을 친북인사들로 ‘가득’ 채웠다. 별로 역할이 없었던 강경화 장관을 정 후보자로 교체함으로써 ‘친북 완결판’을 만든 셈이다. 국정원장, 외교부 장관, 통일부 장관, 국가안보실장, 대통령 통일외교안보 특보 모두가 동색(同色)이다. 남은 임기 동안 큰 판을 벌여보자는 결의에 차 있는 것 같다.
올 코트 프레싱! 장담컨대 이런 접근 방식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 국가 위상을 뒤흔들어 놓고 국민 사이의 갈등만 부추길 뿐이다. 김정은과 그가 이끄는 체제의 속성이 어떤 것인지 뻔히 알 것이면서 왜 이러는지 그 속내를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답답하다.
글/이진곤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