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소리까지도 진솔하고 간절”
“과도한 적대감과 확증편향 탓”
[Ⅰ] “숨소리까지도 진솔하고 간절”
“대한민국은 문재인 보유국입니다!!!”
박영선 전 중소기업벤처기업부 장관이 24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라고 한다. 이날이 문 대통령의 생일이라는데 나름으로는 더할 바 없는 찬사로 여겨 그렇게 썼을 것이다. 그런데 뚜렷이 잡히는 게 없다. 문 대통령을 보유한 게 어떻다는 것일까? 한국 사람이 한국인으로 사는 게 무슨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인지 설명을 좀 들었으면 좋겠다.
사람이 물건도 아니고 ‘보유’는 무슨…. 상징성 넘치는 표현을 찾느라 애쓴 것은 알겠는데 너무 안 어울리는 아부는 타인의 심리적 부담감을 강요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쯤은 알아야 하겠다. 그 글에 이어 “벌써 대통령님과 국무회의에서 정책을 논하던 그 시간이 그립습니다”라고 적었다고도 한다.
그는 이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역이 있는 경남 김해 봉하마을을 방문했다. 가기 전에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올렸다는 언론보도다.
“노무현 대통령님, 대통령 후보 시절 2002년 10월 권양숙 여사님을 인터뷰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때 숨소리까지도 진솔하고 간절했던 권 여사님. 그 진솔함, 간절함이 승리의 이유라고 느꼈습니다.”
‘숨소리 빼놓고는 다 거짓말’이라는 말은 들어봤지만 ‘숨소리까지 진솔’이라는 건 듣느니 처음이다. 정말 대단한 아부술(術)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야말로 입신(入神)의 경지가 아닌가.
아마도 두 사람의 전·현직 대통령을 향해 극상의 아첨을 함으로써 친문·친노세력의 지지를 확보하려는 계산으로 짐작된다. 서울시장 선거에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나서려면 그 사람들의 지지 확보가 선결과제라고 판단했다는 뜻이겠는데 이것이 문 정권 유력자들의 윤리인 모양이다. 그쪽 세계에서 행세깨나 하고 살기도 많이 고단할 것 같은데 그게 좋다는 데야 어쩌겠는가(절대로 아부가 아니라 진실을 말한 것이라면 오독(誤讀)에 대해 사과할 용의가 있다).
그런데 아첨에도 공짜는 없다. 남에게 해 준 이상으로 받고 싶어 하는 게 아부꾼들의 공통된 심리일 것이다. 지위가 높아지고 권력이 커지면 스스로 기대하는 아첨의 단위도 상승하게 마련이다. 물론 다른 욕구도 쑥쑥 자란다. 그 때문에 ‘갑질’ 또는 권력형 비리 논란에 휩쓸리곤 하는 것이다. 높아질수록 겸손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공직자의 도리이지만 그걸 지킬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애초에 비굴함을 택할 리가 없다.
이런 행태가 바로 ‘팬덤 정치’의 한 양상이다. 그 세계에서는 일단 잘못 보이면 그것으로 끝이다. 그냥 내쳐지는 것도 아니다. 온갖 비난과 조롱과 모욕을 다 당한 후에 버려진다. 민주주의를 외치는 세력의 반민주적 작태가 공공연히 행해지는 것이다. 그러니 일단 그 세력 안에서 집단의 신세를 진 이상 끝없는 충성을 거듭 맹세하는 이외의 길은 없다. ‘이니’가 그 정점에 있지만, 그 자신도 자유롭지 못하다. 조직 혹은 진영의 윤리를 어기면 그 순간에 비난과 보복의 맹수우리 행(行)이다. 그들의 위세가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지만….
[Ⅱ]“과도한 적대감과 확증편향 탓”
팬덤정치의 필수・필연적 양상 가운데 또 하나가 ‘선동’이다. 나치스의 선전장관 파울 요제프 괴벨스를 끌어올 것도 없다. 우리 사회의 일상에도 선전 선동은 넘쳐난다. 대중의 심리를 자극해서 극도의 찬양(내편)이나 증오(적편)를 이끌어내는 것이 선동이다. 훈련을 거치는 사람도 있지만, 천부적 자질을 갖춘 사람도 있다.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후자로 보인다.
그가 지난 22일 갑자기 ‘사과’를 하고 나섰다. 재작년 12월 이후 검찰이 노무현 재단과 자신의 계좌를 조회했다고 주장해 온 데 대해서다.
“누구나 의혹을 제기할 권리가 있지만, 그 권리를 행사할 경우 입증할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제기한 의혹을 입증하지 못했습니다. 그 의혹은 사실이 아니었다고 판단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검찰 관계자들에게 ‘정중하게’ 사과하고 책임 추궁을 ‘겸허히’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별일이다. 문 정권의 실세라는 사람들이 확인되지 않은 온갖 소문을 사실인 양 주장해서 많은 사람들의 인격권을 침해하고 명예를 훼손했지만 이제까지 사과를 한 예는 없었다. 그런데 유 이사장이 격식을 갖춰 사과한 것이다.
자신의 가벼운 입 때문에 검찰이 초토화하다시피 했다. 윤석열 검찰총장과 한동훈 검사장은 영문도 모른 채 추미애 법무부 장관으로부터 (말하자면) 몽둥이찜질을 당하는 처지에 놓이기도 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꼼짝없이 검찰의 되치기에 당하게 됐다. 미리 선수 치고 나가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법하다.
“과도한 정서적 적대감에 사로잡혔고 논리적 확증편향에 빠졌습니다. 제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 대해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이렇게까지 창피와 굴욕을 무릅쓰는 표현을 하며 사과했지만, 진정성을 믿어주기는 어렵다. 단지 그것만 사과했을 뿐 허위사실을 주장해 온 다른 언행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기 때문이다. 선택적 사과만을 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 행태다.
일각에선 대선도전을 위한 정지작업이 아니냐는 말도 나오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런 장난까지 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문 대통령이 레임덕으로 빠져드는 시기적 상황을 감안, 자력으로 위기를 벗어나겠다는 나름의 위기돌파 책략(흔히 하는 말로 각자도생)이라는 게 보다 진실에 가까울 것 같다.
유 이사장은 선동의 장에서 발을 빼겠다고 했지만, 정권 안에는 여전히 많은 선동꾼들이 지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선전선동보다 나은 전략은 없다고 믿는 빛이 역력하다. 그걸 진리로 믿는다 하더라도, 발군의 선동 역량을 과시하던 유 이사장이 자기부정을 마다치 않으면서까지 반성문을 쓰고 있는 상황을 한 번쯤은 직시할 일이다.
일엽낙지천하추(一葉落知天下秋)라고 했다. 굳이 시간이나 계절을 따져보지 않아도 나뭇잎 하나 떨어지는 것으로 가을임을 안다는 말이다. 개인도 정권도 언제까지나 왕성한 권세를 뽐낼 수는 없다. 좌파 세력이 자랑하는 재사(才士)가 진실 앞에서 무릎을 꿇는 모습에서 정권의 낙조를 본다.
글/이진곤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