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규모 태양광·해상풍력 추진이 개편 목적
거대 자본 바탕으로 발전사업 독식 우려
정부 주창한 '에너지 민주주의' 역행 비판
우리나라 전력산업 구조에 개편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최근 더불어민주당에서 입법발의한 복수의 전기사업법 개정안에는 '한국전력의 발전사업 허용'과 '재생에너지 발전사업자와 기업 간 전력거래(PPA) 허용' 등이 담겼다.
이는 정부의 그린 뉴딜 정책 일환인 신재생에너지 확대를 위한 방편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에너지 전문가들은 급작스럽게 추진하는 전력산업 구조 개편은 오히려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데일리안은 전력산업 개편 내용을 살펴보고 어떤 효과와 부작용을 가져올지 분석했다.
정부 "한전 신재생 발전사업 참여시키겠다“
대규모 태양광·해상풍력 구축이 추진 목적
전기사업법 개정 쌍수들고 반기는 한국전력
정부와 여당은 한국전력이 다시 발전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려는 모양새다. 2001년 발전과 판매를 분리한 전력산업구조 개편 이래 한전은 발전사업이 금지되고 판매사업과 전력망 사업만 맡아왔다.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지난 7월 송갑석 의원 등 더불어민주당 의원 11명이 전기사업법 일부개정안을 발의했다. 여기엔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신재생에너지 발전사업을 하는 경우 한전 등 시장형 공기업에 두 종류 이상의 전기사업을 허가하는 내용이 골자다.
해당 법안은 현재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소위원회에 회부됐으며, 국정감사 이후 11월부터 본격적으로 법안 심사가 진행될 예정이다.
송갑석 의원은 재생에너지 대규모 개발은 반드시 추진돼야 하지만 초기 투자규모가 크고 전력계통 인프라 구축이 필요해 민간 기업만으로는 투자가 이뤄지기 어려운 현실이라고 진단했다.
송 의원실은 "그린뉴딜 골자인 에너지 전환을 위해서는 해상풍력단지 개발 등 체계적인 대규모 신재생 발전사업 추진이 필요한 실정"이라며 "이에 한전 등 공기업 중심으로 대규모 신재생 발전사업 인프라를 조성하고 민간 기업이 동참하는 산업 생태계를 체계적으로 육성하자는 게 목표"라고 입법 취지를 설명했다.
단 민간 발전사업자들 영역을 침해할 수 있다는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 한전은 신재생에너지 발전사업 중 40MW 이상 규모만 참여가 가능하다. 의원실은 "민간 발전사업자들이 쉽게 공략할 수 없는 대규모 태양광, 대규모 해상풍력만 하겠다는 취지"라며 "만약 발전사업자의 반발이 거세다면 80MW 이상 규모까지 올릴 의향도 있다"고 부연했다.
한전은 수혜가 예상되는 만큼 전기사업법 개정을 환영하고 있다. 한전은 "재생에너지 발전사업에 직접 참여하면 자금 조달 역량을 활용해 사업비용을 절감할 수 있을 것"이라며 "국내에서 사업역량을 쌓아 해외사업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겠다"고 의지를 드러냈다.
한전 발전사업 참여 '기울어진 운동장'
전력망 감시하는 한전이 경쟁서 우위
"한전, 망·판매 두 법인 분리하면 가능"
전력전문가와 민간발전사들은 한전의 발전사업 참여에 비판적인 입장이다. 이들은 송전선로·배전선로 등 전력망을 관리하는 한전이 발전사업에 참여할 경우 발전사업 공정경쟁을 해칠 수 있다고 우려를 나타냈다.
전통적으로 전력산업에서 발전사업과 판매사업은 경쟁분야인 반면 전력망사업은 비경쟁분야로 여겨져 왔다. 발전사업자들이 필요에 따라 난잡하게 망을 건설하는 걸 방지하고 공기업 독점 형태로 운영함으로써 형평성 있게 망을 사용하도록 하는 취지다.
익명을 요구한 전력공기업 관계자는 "발전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계통망이 연계된 지역 확보인데 망을 직접 운영하고 전국의 망 정보를 독점한 한전이 경쟁에서 우월한 지위를 점할 수 밖에 없다"며 "설사 계통 여력이 좋지 않은 지역이라도 송전선로를 새로 구축해 사업을 해내고야 말 것"이라고 설명했다.
민간 발전사업자들의 반응도 동일하다. 민간발전협회 관계자는 "전력망 사업자인 한전에 발전사업을 열어주면 위치가 유리한 곳에 곳에 공용망을 만들고 단가를 떨어뜨릴 수 있다"며 "한전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겠다 공표했지만 똥 누러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마음이 다르듯 한전이 약속한 내용을 지킬 것이라 믿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라고 냉정한 자세를 견지했다.
그는 이어 "제가 한전 사장이라도 발전담당 부서장, 계통담당 부서장을 불러 어디가 망이 좋냐 묻고 발전사업 지역을 고르겠다"며 "반면 민간 사업자가 발전소를 지으려 하면 '그곳은 계통이 좋지 않아 시간이 오래 걸린다'며 제지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고 토로했다.
전력업계와 학계에서는 한전을 발전사업에 참여시키기에 앞서 발전사업자들과 컨센서스(합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송배전사업과 발전·판매사업 주체를 분리하기 위해 (가칭)한전판매주식회사, (가칭)한전송배전주식회사 등 별도의 법인으로 분할하는 방안도 제시된다.
한 에너지학과 교수는 "한전을 기획실, 재무회계, 대표이사 등이 분리된 두 개 법인으로 나누면 신재생 발전사업을 하더라도 판매사업 일환으로 하는 것이니 독점 비난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며 "배전사업과 발전·판매사업은 반드시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전, 자본 바탕으로 발전사업 독식 우려
공정경쟁 깨뜨려 '에너지 민주주의' 역행
막대한 자금동원력, 전기요금 인상 자초
한전이 자금력을 동원해 전력시장을 독식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발전사업자들은 오래전부터 전력시장에서 경쟁을 해온 만큼 경쟁자가 들어오면 본능적으로 자신의 몫이 줄어든다고 학습이 돼 있다. 전력시장에 거대 전력공기업 한전이 들어올 경우 기존 발전사들 파이는 N+1분의 1이 아닌 N+N분의 1 이상으로 쪼그라들 것이란 게 이들의 전망인 셈이다.
노심초사하는 건 민간사업자뿐만 아니다. 한전은 6개 발전공기업을 자회사로 두고 있다. 전력시장의 한정된 파이를 놓고 경쟁이 벌어질 때 한전이 자회사들에 압력을 가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남동·중부·서부·동서·남부발전·한국수력원자력 등 발전공기업 일부 노조는 피켓을 들고 한전의 발전사업 참여를 반대에 나섰다.
문재인 정부는 에너지 전환 시대를 열며 신재생에너지를 중심으로 한 '분권형 에너지 민주주의' 체제를 만들겠다고 공표한 바 있다. 거대 전력공기업 중심으로 독점했던 구조를 탈피해 민간 주체들을 전기산업에 참여시키겠다는 게 골자다. 그러나 송배전망, 판매사업을 하는 한전이 발전사업까지 거머쥘 경우 민간 발전사들에 대한 갑의 지위를 더욱 공고하게 함으로써 정부가 주장했던 에너지 민주주의를 스스로 저버리는 꼴이 된다.
한전이 신재생에너지 발전사업에 뛰어들면 전기요금이 인상될 가능성도 크다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다. 한전은 거대기업으로서 조달금리를 저렴하게 받아 신재생 발전사업에 투자할 수 있지만 신재생이 수익을 담보할 수 없어 그만큼 위험성이 크기 때문이다.
한전은 올해에도 나이스신용평가, 한국기업평가, 한국신용평가 등에서 '신용등급 트리플에이 제로(AAA0/안정적)'를 받은 만큼 저금리로 공사채를 발행할 수 있다. 또 한국해상풍력주식회사와 같이 특수목적법인(SPC)를 만들어 PF를 동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금을 투자할 여력이 크다고 해서 신재생 발전사업에서 이익을 볼 것이란 생각은 오산이다. 한전이 지금까지 뛰어들었던 해외 신재생에너지 사업의 결과가 이를 방증한다.
이번 국정감사에서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전봉민 의원(국민의힘)이 국민연금공단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한전이 미국 태양광 발전사업에 투자한 결과 254억원 손실이 났다. 특히 콜로라도 태양광발전소는 계약 당시 분석한 발전량에 미치지 못하는 실적을 내면서 올해 7월 190억원의 손실(매몰비용)을 보고 사업을 철수해야 했다.
이러한 경험에 비춰볼 때 투자 비용이 커질수록 한전에 손실이 부메랑처럼 돌아올 가능성이 높아진다. 민간발전협회 관계자는 "신재생에너지 과다 투자, 손실 발생 등으로 부채비용이 올라갈 경우 전기요금 판매가격 정하는 한전 입장에서는 손실을 메꿀 방안을 찾아야 한다"며 "자연스럽게 전기요금 요금 인상 유혹에 빠지기 쉬운 구조"라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