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북한 이상기류? 꿈 깨야하는 이유
<박경귀의 중국 톺아보기>절대 근본이 안바뀌는 북중 관계 4가지 요인
북한과 중국의 ‘순치(脣齒)관계’
한국의 현대사에 외교안보 및 정치경제적으로 가장 긴밀히 연관되어 왔고,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나라는 미국과 중국이다. 특히 중국은 분단된 한반도와 육지와 해상으로 영토를 맞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북한의 절대적 후견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반도의 통일에 가장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나라이다.
따라서 동북아시아의 안정과 평화정착, 나아가 한반도 통일의 도정에서 중국의 경제적, 군사적 부상은 중국의 역할에 대한 관심과 기대를 그 어느 때 보다도 높여주는 계기가 되고 있다. 물론 그 기대는 긍정적인 측면과 함께 부정적인 우려 또한 동반하고 있다.
중국은 북한의 도발로 인해 남북한의 갈등이 고조될 때, 가끔 우리에게 우호적 입장을 보여주는 듯하지만, 대부분 북한에 대한 옹호로 결말지어 우리를 실망시키곤 했다. 이는 우리가 중국의 대북한 행동방식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데서 기인한다.
따라서 중국의 행동패턴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일은 긴요한 일이다. 특히 중국과 북한의 오랜 관계의 특수성과 관계 변용 과정의 함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동북아의 국제정치에서 중국이 취할 행동방식을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다.히라이와 슌지는 북한과 중국의 60년의 관계사 속에서 핵심적 이슈를 중심으로 그 관계 요인을 규명하고 있다. 이를 통해 중국이 북한을 바라보는 시선과, 북한이 중국을 대하는 내심을 간파함으로써 양국 간의 관계의 의미와 행동방식을 이해하게 해준다.
북중 관계를 규정하는 4가지 요인과 구조
한마디로 북한과 중국의 관계는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로 규정할 수 있다. 히라이와 슌지는 이러한 ‘순치(脣齒)관계’ 생성의 역사적 배경과 이러한 인식 구조가 만들어내는 현실의 특정사안에 대한 양국관계의 외교관계의 특징, 그리고 순치관계의 변용과정을 상세히 분석해냈다.
중국과 북한의 ‘순치의 관계’는 항일투쟁과 한국전쟁에서의 상호 공조의 경험에서 형성되었다.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덩샤오핑 등 중국공산당 혁명 1세대와 김일성, 김책, 최현, 박성철 등 1936년부터 빨치산 활동을 함께 하던 북한의 혁명 1세대 사이의 동지적 교감과, 중공 인민지원군의 참전에 의한 피를 나눈 전우애가 ‘순치관계’의 정서적 뿌리라고 볼 수 있다.
중국과 북한에게 서로 ‘순치의 관계’를 구성해주는 실질적 내용은 무엇일까? 무엇이 서로를 의지하게 하고, 한쪽이 없으면 다른 한쪽의 존재가 힘들어지는 관계를 만들고 있는가. 북중 관계를 규정하는 요인은 크게 네 가지로 볼 수 있다. 첫 번째 안전보장, 두 번째 요인은 이데올로기, 세 번째는 전통적 관계, 네 번째 요인은 경제 관계이다.
이러한 관계 요인들은 한 번에 동일한 긴밀도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전개된 국내외적 상황의 변동에 따라 부가적으로 추가되었다. 또한 각각의 관계 요인에 있어서도 중국이 바라보는 북한에 대한 인식과 북한이 바라보는 중국에 대한 인식이 완전하게 동일한 것이 아니라, 시대별로 미묘한 차이를 보였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50년대는 중국과 북한이 서로의 중요성을 충분히 느낀 시기였다. 사회주의 혁명을 완성해 나가는 과정에서 이데올로기적 동지애는 물론, 6.25전쟁기의 중국 인민지원군의 참전은 ‘제국주의’에 대한 공동투쟁전선에서 ‘항미’(抗美)의 상징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중국은 타이완 해협에서 긴장을 조성하고 북한 내 인민지원군의 철수를 단계적으로 실시하면서 북한에게 미국의 위협에 균형점을 만들어 줄 수 있는 중국의 존재의의를 강하게 인식시킬 수 있었다. 또한 타이완과 한반도에서의 미국과의 대결의 장에서 북한과의 결속력을 통해 대미투쟁력을 제고할 수 있었다.
북한 역시 남한을 무력으로 공산화하려는 ‘조선혁명’을 국내적 사안이 아니라 세계혁명의 일환으로 규정함으로써 중국과 소련의 관여를 확보하고, 한국과의 투쟁과 미국과의 투쟁이라는 두 개의 연속성을 지속시킬 수 있었다.
특히 북한은 한국의 혁명적 상황을 조성하기 위해 조국통일 노선을 중심적 과제로 설정하여 주한미군철수를 필요불가결한 조건으로 규정했다. 특히 대미 투쟁의 안정적 발판을 만들기 위해 1961년 7월 6일 및 11일에 소련 및 중국과 각각 ‘우호협력및 상호원조조약’을 체결하여 안전보장상의 담보를 제도화하는 데 성공한다.
중국이 북한과 맺은 ‘중조우호협력상호원조조약’은 ”체약국의 한쪽이 어떤 한 나라 또는 수개국의 연합으로부터 무력 침공을 받아 전쟁상태에 돌입한 경우, 체약국의 다른 쪽은 모든 노력을 기울여 지체 없이 군사적 및 그 이외의 원조를 제공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북한이 관여된 한반도 유사시 중국의 자동개입을 천명한 대목으로 중국과 북한 관계의 긴밀함을 강력하게 담보하는 것으로써, 이후 중국과 북한의 관계를 특정 짓는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특히 조소조약이 북한 유사시 자동지원을 ‘의무’화하고 있지 않고 5년마다 갱신되는 유한조약인데 반해, 조중조약은 ‘의무’라는 문구를 명시하고 있고, 무기한이란 점도 주목할 만하다.
밀월과 갈등관계 오가는 북중관계의 시계추
중국과 북한의 관계는 시대적 환경에 따라 밀월관계에서 긴장 내지는 갈등관계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갔다. 특히 1963년 중국과 북한 정상의 상호 방문을 통해 북한이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원칙과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기초를 인정하면서도 조선인민의 혁명투쟁과 건설 사업을 영도하는 데 있어, “모든 문제를 독자적으로, 자국의 실상에 맞게, 그리고 주로 자기 자신의 힘으로 해결해 나가는” ‘주체’의 원칙을 강조하면서 양국의 관계 구조가 변하기 시작한다.
북한의 ‘주체사상’ 강조는 사회주의 사상의 종주국이자 주축국인 소련 및 중국과 일정한 거리를 두겠다는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북한은 소련과 중국에 자신의 ‘주체’를 인식시키는 데 성공한다. 북한의 ‘자주노선’은 1965년 중국에서 프롤레타리아 문화 대혁명이 시작되면서 홍위병의 김일성 비판을 불러왔고, 이는 중국과 북한 관계를 악화시켰다.
문화대혁명이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실권파’ 타도라는 정치적 의도에서 시작된 만큼, 류샤오치를 비롯한 실권파가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북한의 마오쩌둥을 겨냥한 ‘교조주의’ 비판을 공유하고 북한의 주체를 인정해 준 상대가 마오쩌둥의 타도 대상이었던 류샤오치였다는 점에서 김일성과 북한지도부는 홍위병의 비판을 받게 되었고, 다시한번 ‘주체’를 인정받아야 하는 상황에 처했던 것이다.
중국과 북한이 각각 대사를 소환할 만큼 심각한 긴장 상황에 빠졌던 상황은 1970년 김일성의 중국 비밀방문에 의해 저우언라이와 마오쩌둥과의 연속회담을 계기로 양국 관계가 정상화됨으로써 해소되었다. 여기에는 1968년 소련의 체코 군사개입에 대해 중국이 소련을 ‘사회제국주의’로 비판하고, 평소 공산당, 노동당 간에 호혜평등, 내정불간섭의 원칙 유지를 주장하던 김일성이 소련에 대한 불신감을 더욱 강하게 갖게 되면서 중국과의 관계 개선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 정치적 국제환경변화가 도움이 되었다.
이 과정은 이데올로기적 차이에서 발생한 갈등이 전통적인 관계에 의해 수복되는 과정으로 평가된다. 히라이와 슌지는 양국관계의 수복 과정에서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던 친중파인 최용건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가 이를 주목하는 이유는 중국과 북한의 전통적 관계의 상징적 인물들의 사망에 의한 퇴조는 불가피하게 향후 양국 간의 전통적 우호의 긴밀도를 낮추고 관계의 수복력 또한 저하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70년대에 들어와 중국과 북한의 ‘순치 관계’의 구조가 변화하고 ‘전통적 우호관계’ 또한 이완되는 변동을 겪는다. 1972년 2월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고, 9월에 중일국교가 정상화 되었다. 또한 1972년 7월 4일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고 남북의 상대를 상호 인정하고 남북대화를 촉진시키는 등 국제 및 동아시아 정치질서에 격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미국과의 투쟁의 이념전선을 강조하던 북한의 투쟁성을 악화시킬 수 있는 위험성이 커졌다. 더욱이 미국을 우선시한 중국의 국제관계관은 북한에겐 굴욕적인 사태였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한 북한은 자신들의 혁명관과 국제사회관의 근본적 수정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아가 중국과의 새로운 관계 설정으로 변화된 현실 사이에서 자신들의 관점에 정합성을 주어야 했다.
하지만 중국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이어 1979년 정식 수교를 통해 미국이 대만과 단교하고 ‘하나의 중국’을 인정하게 만드는 외교적 성공을 거둔다. 나아가 한반도 문제를 미중관계를 결정적으로 저해하지 않는 구조, 즉 ‘한반도문제의 한반도화’로 변질시켰다.
이는 북한에게 ‘한반도문제와 타이완문제의 연계’와, 미국을 주적으로 하는 중조 유대 관계가 형해화(形骸化)되는 것을 의미했다. 또 중국과 북한 관계를 규정하는 요인인 안전보장 관계와 이데올로기적 관계의 비중을 저하시키는 과정이기도 했다.
더구나 중국은 등소평의 지도 아래 80년대 체제유지와 정치적 투쟁의 일환으로 개혁개방노선에 박차를 가했지만, “주체사상이라는 일원적인 가치기준에 의해 관철되는 체제”인 북한은 경제개혁으로 사회가 다원화 되고, 개인주의화 되는 것이 정치적 다원화를 추동하는 위험성을 수반한다고 보고 이를 경계하게 된다. 북한은 소련의 경제개혁이 체제개혁으로 이어져 결국 소련의 붕괴를 가져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중국의 대북한 영향력의 변질
북한의 개혁개방노선의 기피는 성공적 경험을 갖고 있는 중국이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여지를 축소시켰다. 게다가 한국이 북방외교의 결실로 1990년 소련과 국교를 맺고, 1992년에 중국과 잇달아 수교함에 따라 북중관계의 구조적 변질이 가속화되었다. 이는 한국, 미국, 일본과 수교한 중국이 국제정치에서 중조의 양국 간 관점에서 다자적 관점으로의 전환을 요청받게 된 상황에 기인했다.
이런 상황은 중국이 북한에 대한 독점적 영향력을 상실하게 하였지만, 한편으론 북한의 경제난 등에 따른 국제적 지원 분담으로 자신의 부담을 경감시켜 주었다. 특히 중국은 이 와중에 “한반도문제를 국제문제화 시켜 그 속에서 상대적 영향력의 우위를 확보하고, 한반도 정세에 관한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중국은 한국과 주변국의 기대에 부응하는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1993년 북한이 NPT(핵확산방지조약) 탈퇴 선언으로 시작된 한반도의 핵 위기 상황에서 한반도의 항구적인 평화적 체제 구축을 위해 1997년 한국, 북한, 미국, 중국의 4자회담이 시작되고, 중국이 한반도의 비핵화를 지지했지만, 이후 북한에 대한 적극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북한의 핵문제 해결을 위해 2003년 시작된 6자 회담에서도 중국이 의장국을 맡았지만, 2006년 7월의 북한의 미사일 발사실험, 10월의 1차 핵실험, 2009년 4월의 미사일 발사실험과 5월의 2차 핵실험을 막아내지 못했고, 실효적인 대북제재에도 미온적이었다.
2010년 3월 26일 북한의 천안함 폭침 도발과 2010년 11월 23일 연평도 포격 도발에 대해서도 중국은 사전에 통보받지 못했고, 이런 징후를 포착하여 미연에 자제시키지도 못했다. 북한이 2차 핵실험 사실을 사전에 중국에 통보했던 것과 대조적이다. 이는 햇볕정책의 폐기로 경제지원을 중단한 이명박 정부와 한국 국민에 대한 보복임과 동시에 다자관계 속에서 북한을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고 있는 중국에 대한 누적된 불만의 표출이기도 했다.
중국은 북한에 대한 통제력과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한 것일까? 2001년 ‘9.11’이후 중국의 한반도정책은 “미중관계를 항상 의식하면서 북한과의 관계를 계속 조정하는 점점 ‘미묘한 관계’가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현격하게 약화된 중국의 대북한 영향력은 북한의 완고한 벼랑끝 전술에도 기인하지만, 중국이 한국과 북한에 대해 ‘등거리 원칙’을 적용하는 데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중국의 대북한 3대 정책기조와 시사
이런 점에서 저자가 진단한 한중 국교정상화 이후 중국의 대북한 정책의 기조는 설득력이 있다. 그는 중국이 “① 남북 두 정권을 한반도문제의 당사자로 인정하고, 남북 간의 합의를 중요시하고, ② 자주성을 중요시하는 북한의 태도를 경화시키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적극적 관여는 행하지 않고 일정한 역할을 확보하고, ③ 국제적인 틀을 통해서가 아니라, 2국관계의 틀만으로 북한과의 관계를 유지한다”는 북한정책을 추진하고 있다고 보았다.
특히 한중 수교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한국에 대한 자세는 중조관계를 희생으로 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제한”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결국 중조 관계에서 ‘순치 관계’와 ‘전통적 관계“가 상당히 희석된 것은 사실이지만, 중조 친선을 강화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중국의 전략적 방침임은 분명하다는 것이다. 이는 중조 양국의 정상과 지도부가 상호 방문 시 반복하여 강조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저자가 진단하듯, 중국이 “북한이 철저하게 거부하는 문제를 바꾸는 영향력”은 갖고 있지 않는 것 같다. 이는 북한이 “중국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것이 되지 않도록, 교묘하게 중국 이외의 관계국을 이용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북한이 대외정책의 중심을 대미관계에 둘 때, 중국의 북한에 대한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약화된다. 또한 한국과의 관계가 긴밀해질수록 북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은 줄어들고 중국에 대한 북한의 반발과 갈등의 소지는 오히려 높아질 수 있다.
여러 가변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주변국 가운데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그나마 상대적으로 많이 갖고 있는 국가 또한 중국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중국이 북한에 대한 영향력이 없다고 하는 것이 실제의 사정이 아니라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변명일 수도 있는 이유다. 중국이 국제정치의 다자 관계에서는 ‘북한에 대한 영향력이 없다’며 자신의 역할을 한정하고, 중조 양자 관계에서는 나름의 영향력을 유지하는 이중의 전략을 구사하는 것은 아닐까?
현재 북한은 중국의 경제지원이라는 생명선에 의지하고 있다. 그런 만큼 중국과의 경제적 관계는 더욱 긴밀해 지고 있다. 중국 또한 북한에 대한 일정한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나아가 중국 자신의 국익을 위해 경제지원을 중단할 수 없는 입장에 있다. 따라서 중국과 북한의 정치체제가 변화하지 않는 한, 중국과 북한 쌍방에게 상대의 ‘전통적 우의‘의 존재가치는 여전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 인식은 북한의 핵개발 포기와 도발을 중단시키고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만들어 나가야 할 한국에게 새로운 해법을 모색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 책이 중국과 북한관계의 구조와 특징을 잘 보여줌으로써, 한국이 대북한 정책을 둘러싼 중국 등 주변국과의 관계의 방향을 어떻게 설정해 나가야 할지에 대해 숙고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중국과 북한관계를 규정하는 4가지 특징적 요인 중에서 한국과 중국이 원천적으로 안전보장, 이데올로기, 전통적 관계는 공유할 수 없는 만큼, 한국이 중국과 북한의 관계요인 중 상쇄시키거나 대체할 수 있는 요인은 현재로선 오로지 ‘경제적 관계’뿐이다.
하지만 중국과 북한에서 항일투쟁과 한국전쟁의 경험을 공유한 세대가 점차 소멸하고, 중국에서 자본주의를 접하며 성장한 신세대가 대두하면 할수록 북중 간의 이데올로기와 전통적 관계가 희석되고 형해화할 것은 틀림없다. 거기에다가 중국과 한국의 경제적 관계의 확산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낸다면 북중관계에 더 큰 변화의 물꼬가 만들어질 수도 있을지 모른다. 또 그런 변화가 북한에서 발생할지도 모를 일이다.
중국과 북한의 관계는 계속 변화해 왔고, 앞으로 ‘전통적 관계’의 변용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중국의 북한에 대한 영향력 발휘를 통해 북한을 변화시키기 위해 중국에 지나치게 의존하려는 경향은 지양할 필요가 있다. 중국의 대북한 영향력의 한계가 존재하는 것을 부인할 수도 없는 만큼, 한국의 대북한 정책, 미국과 일본의 대북한 정책의 변화를 통한 영향력 확보 전략에 대해서도 고민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의 구축은 길고도 험한 길이다. 긴 호흡을 가져야 한다.
글/박경귀 한국정책평가연구원장(kipece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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